백성기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승선, 한성부우윤, 군부협판, 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효천(孝天)
소송(小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0년(철종 11)
사망 연도
1929년
본관
수원(水原)
관련 사건
임오군란
정의
대한제국기 승선, 한성부우윤, 군부협판, 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한성부판윤 겸 경연특진관 백남익(白南益)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 남항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올랐다.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해 승선(承宣)·철산부사(鐵山府使)·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경상좌도병마절도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는 갑오개혁 때 제정된 육군계급제도에 따라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갑산부관찰사(甲山府觀察使)·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간사부에 소속되어 활약한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신식 군제 설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편으로 인해 군정의 문란함이 극도에 달하자 1900년에는 군정교구(軍政矯捄)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아들여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하여 일련의 군제 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원수부군무국총장·기록국총장·검사국총장·평안북도관찰사·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말에는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때에는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은퇴해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
『독립협회연구』(신용하, 일조각, 1976)
『한국군제사』-조선후기편-(육군본부, 1976)
「독립협회연역략(獨立協會沿歷略)」(『창작과 비평』 5-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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