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공예
개념
백토로 만든 형태 위에 무색 투명의 유약을 입혀 1,300℃∼1,35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
정의
백토로 만든 형태 위에 무색 투명의 유약을 입혀 1,300℃∼1,35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
개설

인류가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이기(利器) 가운데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은 대체로 토기(土器라는 용어는 earthen ware의 일본인 번역이며, 우리는 瓦器라 하였다.)·도기(陶器)·석기(炻器: stoneware의 일본인 번역어)·자기(磁器)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자기는 이 중에서 가장 발전된 것으로서 자화(磁化)가 잘 이루어진 치밀질을 말하며 백자(白磁)를 뜻한다. 그러므로 백자의 개념을 규정하면 자연히 자기의 개념과도 일치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개념규정이 여러 가지이고 자기와 도기와 석기를 각기 한 선을 그어 명확히 구분해 보려 해도 매우 애매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이것이 가장 명확한 개념규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요업협회 도자기부문 개념명칭규정위원회에서 1950년에 발표한 분류법에 따르면 “자기(porcelain)는 태토(胎土)에 유리질을 함유하고 있는 번조물(燔造物)이며, 유약의 유무를 상관하지 아니하며 태토의 흡수량은 1에서 0.5%까지이다.”라고 하였다. 이 개념규정도 보편적인 개념규정이고 절대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백자의 경우도 자기와 동일개념이기 때문에 그 개념규정이 똑같이 어렵지만 그 개념을 규정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으며, 이 몇 가지 방법에 모두 합당해야만 백자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시각을 통해서 그 개념을 규정할 수 있다. 백자는 태토와 유약으로 만들어지며 서로가 밀착된 상태로, 태토는 순백이어야 하며 유약은 무색투명하여야 한다.

따라서 시각으로 보는 백자는 물론 순백이다. 두 번째는, 간단한 물리적인 실험방법이다. 태토와 유약이 일체가 된 상태에서 서로 깎여 떨어지지 않아야 하고, 유약에 빙렬(氷裂)이 없어야 하며, 표면을 금속성의 예리한 칼로 긁어도 흠이 나지 않으며 반투명질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번조온도에 의한 것으로 가마 안의 온도가 1,300°∼1,350℃에서 번조되어 자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개념규정은 서양이나 일본보다 거의 1000년이나 앞서 백자를 생산하였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먼저 만들어냈을 법한데 그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양과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여러 가지로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를 생산하기 이전에는 자기는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 매우 소중한 최첨단 선진문명이었는데, 그들은 비록 뒤늦게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지만 그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그들의 높은 기초과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반을 둔 실험적이고 분석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방식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자기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생산되어 세계에 널리 퍼져나갔으므로 차이나(china)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중국에서 본격적인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성당(盛唐) 이후라고 생각되며 우리나라는 조금 뒤늦은 신라 말경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자기를 ‘자기(瓷器)’라고 썼으며 속자로 ‘자기(磁器)’라고도 하였다.

‘자기(磁器)’라는 표기는 허난성(河南省) 자주요(磁州窯)의 도기질 생산품이 매우 많았으므로 자주요의 그릇[磁州器]이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원칙적으로는 반드시 ‘자기(瓷器)’라고 쓴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이후에 ‘자기(磁器)’라고 많이 썼으며 일본에서도 ‘자기(磁器)’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따라서 백자의 경우에도 중국에서는 ‘白瓷’라고 쓰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백자(白磁)’라고 표기한다. 원래 ‘자(磁)’자는 ‘지남석’이라는 글자로 쇠를 잡아당긴다는 뜻이다.

‘자(瓷)’자는 중국에서는 ‘단단하고 치밀한 도기’라는 뜻으로, 자기(瓷器) 중에서는 강서성 경덕진(景德鎭) 생산품을 제일이라고 하였으므로 당연히 치밀질 백자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서에는 ‘자(瓷)’는 오지그릇이라고 했으며 이를 다시 풀어서 말하면 도기·옹기·질그릇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자(瓷)’자는 광의의 흙을 구워서 만든 그릇이라는 뜻이지만 자기를 한자표기로만 한다면 ‘자기(瓷器)’라고 표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이후에 특별히 치밀질 자기를 나타내는 문자로 ‘자(磁)’자를 따로 택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자(瓷)·옹(甕)·자(磁)’자를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자(瓷)’자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사기(沙器)·도기(陶器)·옹기(甕器)라고도 하였다.

조선에서도 이와 같이 표기했지만 조선시대로부터 점차 자기와 도기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자기소(磁器所) 139개소, 도기소(陶器所) 185개소가 따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군현 토산조에 특산물로서 자기 31개소, 도기 12개소, 사기 4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匠人)은 주로 사기장(沙器匠)이라고 하였고, 간혹 자기장(磁器匠)이라고도 했으며, 또한 초기부터 자기를 분명히 백자(白磁)라고 하였으면서 사기번조(沙器燔造)·진상사기(進上沙器)·일용자기(日用磁器)·화자기(畫磁器)라는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도자기 표기례를 참조하여 보면 처음에는 자기와 도기를 혼용하다가 점차 치밀질 자기와 자기에 못 미치는 도기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자기와 도기를 함께 사기(沙器)라고도 표기하였다.

조선 전기 성현(成俔)의 저서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자기는 백토(白土)를 사용해서 비로소 정치(精緻)하게 번조할 수 있다. 지방의 각 도에는 자기를 제조하는 곳이 많고 그중에서도 고령(高靈)의 자기가 매우 우수하였으나 이것도 광주(廣州) 자기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자기가 바로 치밀질 백자임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백자는 치밀질의 우수한 순백의 자기라는 것을 이미 조선 전기부터 분명히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질이 우수한 백자는 자기(磁器)라고 하였으며, 질이 우수한 백자나 질이 낮은 백자 또는 도기질에 가까운 것 모두를 통칭해서 사기라고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근세에 가까울수록 자기는 백자를 가리키며 사기는 백자와 자기와 동일개념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도기는 오지·옹기로 완전히 구분하게 되었으며 토기는 질그릇[瓦器]이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 백자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1950년대까지 우리는 백자를 사기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말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백자라는 치밀질 자기의 개념이 더욱 분명해진 것이라고 하겠다.

백자의 성분

백자는 규사(硅砂, 硅酸, 石英)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질’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長石質)의 잿물을 입혀서 1,300°∼1,350℃에서 번조하여 자화된 치밀질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질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태토 또는 백토·도토(陶土)라고도 하며, 잿물 역시 우리말로 보통 유약(釉藥)이라고 한다. 태토와 유약에는 여러 가지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에서 백자의 색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철분이다.

자기와 연관이 깊은 철분은 산화제일철(FeO)과 산화제이철(Fe2O3)인데 철분이 태토나 유약에 들어 있으면 순백의 백자가 되지 않고 회흑색·회색·갈색·황색·회청색·청색의 여러 가지 색을 나타내게 되어 좋은 백자가 되지 못한다.

좋은 백자를 만들려면 애초에 철분 등 불순물이 없는 태토와 유약의 원료를 선정하거나 최소한의 철분이 들어 있는 원료를 선정해서 이를 수비하여 철분 등 불순물을 걸러내야만 한다. 그러나 철분이 절대로 없는 원료란 거의 없다고 하겠으며, 미량의 철분이 들어 있으므로 시대와 지방·가마에 따라 각기 독특한 백자가 생산되는 것이다.

미량의 철분은 태토와 유약 안에서 가마 안의 분위기에 따라 대략 다음과 같은 발색을 한다. 산화제이철은 가마 안의 분위기가 마지막까지 산화번조(酸化燔造)일 때에는 갈색 내지는 황색을 머금게 되고 가마 안의 분위기가 마지막에 환원번조(還元燔造)일 때는 회청색 내지는 청색을 머금게 된다.

이 때 직접적인 발색의 효과는 태토도 중요하지만 유약이 좀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가마 안의 분위기라 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산화염번조와 환원염번조가 있는데 산화염번조는 가마에 불을 땔 때 산소를 공급하면서 불을 때는 것이고(불 때는 가마 아궁이를 열어 놓고 굴뚝도 열어 놓는다.), 환원염번조는 산소의 공급을 차단하면서 불을 때는 것이다(땔감을 많이 빠르게 집어넣고 불 때는 아궁이를 막아 놓거나 굴뚝의 밑을 막기도 한다.).

산소공급이 많으면 태토나 유약에 포함되어 있는 미량의 철분이 모두 산화되어 산화제이철이 되어 녹슨 색이 되므로 철분의 함유량에 따라 갈색 또는 황색을 머금게 되고 산소공급이 차단되면 철분이 모두 환원되어 산화제일철이 되며 쇠의 본래의 색인 푸른색이 되며 철분의 함량에 따라 회청색 또는 단청색을 머금게 된다.

중국의 경우는 대체로 화북(華北)지방에서는 산화번조 위주이므로 백자의 발색이 황색을 머금은 따뜻한 질감이 되고, 화남(華南)지방에서는 환원번조 위주이기 때문에 담청색을 머금은 차가운 질감의 백자가 나온다.

화북지방에서도 당대(唐代)의 형요백자(邢窯白磁)는 환원번조 위주인 담청색을 머금고 있으나 후대에까지 계속된 화북의 명요인 정요(定窯)는 산화번조로 담황색 내지 베이지색을 머금은 것이 많다. 화남의 유명한 가마인 경덕진의 백자는 환원번조로 담청색을 머금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거의 환원번조 일색이며, 특히 백자의 경우에는 환원번조로 일관하여 모든 백자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청색 또는 담청색을 머금고 있다. 도자기 발달의 주류는 토기에서 도기·석기로, 도기·석기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었으며 지금은 백자시대이다.

지금 백자의 질이 점점 더 강화되고 규사가 첨단소재로 이용되는 등 자기산업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청자와 백자가 공존하는 시기와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시기에 백자와 유사한 청백자(靑白磁, 影靑)가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청백자와 백자를 꼭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아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대체적인 구분은 쉽게 할 수 있으며 구분하여야 할 필요도 있다. 청백자라 하면 외관상 유약이 백자보다 푸른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유약에 푸름이 깃들인 당대의 형요백자나 일부 정요의 백자들을 청백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청백자는 북송(北宋) 때부터 강서성 경덕진가마에서 생산된 것으로 유약·번조기법·문양 등을 달리하면서 원대(元代)까지 이어져내려온 백자의 일종이다.

유약은 농도의 차이는 있으나 푸름이 깃들여 있고, 기벽이 얇고 치밀질 백자보다 약간 낮은 화도에서 자화된 것 같으며 따라서 백자와 같이 견고하지는 못하다.

청백자는 북송 이래 화남지방인 경덕진가마의 생산품이었으며, 같은 경덕진가마에서 원대 중엽인 14세기초경부터 추부백자(樞府白磁)라고 불리는 새로운 치밀질 백자가 생산되었는데 이 추부백자가 점차 발달하여 현재의 백자로 이어졌다.

따라서 견고하지 못한 청백자는 점차 사라지고 소위 추부백자는 그 생산량이 늘었으며, 현대 백자의 조형(祖形)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의 백자

우리나라는 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백자도 번조하였다. 당시의 청자가마는 서남해안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백자가마는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있는 청자가마에서 청자와 함께 번조한 예가 있을 뿐이며 그 수량은 아주 적다.

이때의 백자는 초기단계라 일정하지 않으나 기벽이 얇은 편이며 유약도 얇게 입힌 편이고, 유빙렬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고, 발색은 베이지색을 약간 머금은 것과 푸름을 머금은 것이 있으며, 그릇 표면은 매끈하게 잘 정리되었다.

이후 10세기경까지 고려백자는 청자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량이었으며 햇무리굽 백자가 소량 생산되었고 가마는 역시 용인시 이동면 서리에 있다. 기벽은 초기보다 두껍고 유약에는 대체로 미세한 빙렬이 있으며 환원번조되어 푸름이 감돈다. 11세기에는 이러한 초기 백자와는 전혀 다른 백자가 생산되었다.

그 질은 초기 백자보다 자화되지 않았으므로 더 약하며, 태토는 마치 잡물이 섞인 거친 석고와 같다. 유약은 대체로 아주 얇게 입혀졌고 태토와 유약이 서로 밀착되지 않고 유약이 떨어져나간 예가 많다. 이 때 청자는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나 백자는 초기보다도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그 이유는 백자는 아직 미숙하여 내화도가 높은 순백토를 이용하고 유약의 선정도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2세기에는 주로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가마에서 백자를 생산하였고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가마에서도 소량의 백자를 생산하였다.

12세기 백자는 태토와 유약이 11세기보다 발전하여 기형이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고려적인 세련을 보이고 태토도 자화가 이루어지고 유약도 용융상태가 양호하나 유약이 떨어져나가는 현상은 역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12세기 백자도 청자에 비하면 그 수량이 미미하나 전대보다는 수량이 늘어났다.

13세기와 14세기 전반까지는 백자도 고려청자와 같은 퇴보를 보이고 수량도 더욱 줄어든 상태였다. 14세기 전반에 중국의 경덕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백자가 등장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 고려에서도 새로운 백자를 생산하게 된다.

기벽과 유약이 두껍고 표면발색은 푸름을 머금었으며 조금 거칠지만 이미 고려에서도 새로운 백자시대에 돌입하여 조선조 백자의 찬연한 서막을 장식하고 있다. 이 14세기 후반의 고려 백자가마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 석수동에 있다.

아직까지는 발견된 곳이 이곳 한 곳뿐이지만 앞으로 더 발견될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고려 말 백자가마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의 조선 초 백자가마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백자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국초부터 백자의 생산과 관리에 힘을 기울였으며, 전국민의 백자에 대한 선호가 대단하여 독특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용재총화』에 “세종 때의 어기(御器)는 백자만을 전용한다.”고 했으며, 『세종실록』에 이미 명나라 사신이 백자를 요구한 사실이 여러 번 있으며 『광해군일기』에도 “왕은 백자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미 초기에 우수한 백자를 생산한 조선조에서 말기까지 우수한 백자에 대한 호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사서에 수많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광주는 중앙관요로서 조선 백자가마의 핵심이었다.

광주에서 생산되는 백자는 전기와 중기 초까지는 상·중·하품이 있었으며 중기 후반 이후부터 후기까지는 거의 상품 위주로 생산하였다. 상품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여 그릇을 빚고 이를 다시 갑(匣, 匣鉢, 개비)에 넣어 번조하여 그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한 것이며 이를 갑번(匣燔)이라고 하였다.

갑번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분원(分院)의 갑번백자를 쓰고 싶어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당시 상품백자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번천리와 경상북도 상주시 북추현리·이미외리, 경상북도 고령군 예현리(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예현리) 등 3개 지방에 4개소의 가마가 있다고 하였는데, 광주 번천리 가마는 상품백자를 생산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나 고령과 상주에서는 아직 상품백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에는 자기와 도기라는 용어를 혼용하고 있었고, 당시 지리지의 기초자료를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와 도기를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기(1392~1650)

전기의 상품백자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번천리·오전리, 퇴촌면 도마리·우산리·관음리·도장골·정지리, 초월면 무갑리 등지에서 번조되었다. 상품백자는 물론 갑에 넣고 번조하여 티 하나 없는 청정한 것이다. 유약은 거의 빙렬이 없고 다소 푸름을 머금었으며 약간 두껍게 입혀졌다.

광택은 은은하고, 잘 번조된 것은 유약에 기포가 적절히 포함되었으며, 표면에 미세한 요철이 있어 표면이 부드럽다. 태토는 순백이며 유약과 태토가 밀착되어 떨어져나간 예가 없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마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난 뒤에 맑게 갠 하늘 아래서 소복이 쌓인 푹신한 눈을 보는 것 같다.

중품은 태토에 약간의 철분이 함유되어 태토색이 담회색이며, 유약에도 미량의 철분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담청색을 머금어 표면색이 담담한 회청색이다. 유약은 미세한 빙렬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하품의 태토는 순백이고 유약에는 미량의 철분이 함유되어 있어 약간의 푸름을 머금고 있다.

기면에 물레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죽절굽 또한 많으며 태토비짐눈으로 번조하였다. 전기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조선 초 국가의 이념을 형상화한 품격이 있다. 원만하면서 풍만하지 않고 유려한 선이 아닌 유연한 선의 흐름에서 절제하면서 내면의 선비다운 절조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전기 후반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크게 황폐하였으며 우리의 도자기산업도 크게 위축되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 또는 ‘다완전쟁(茶碗戰爭)’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자기네보다 선진문화국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진기술인 ‘도자기’에 대한 오랜 선망과 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수많은 사기장인(沙器匠人)이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은 비로소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고 도자기산업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의 도자기산업은 세계를 지향하여 큰 비약을 하게 되고 지금 세계 도자기산업의 최첨단을 걷게 되었다.

중기(1651~1751)

중기의 백자는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그 특징이 나타나서 18세기 중엽까지 그 모습이 이어진다. 후반부터 중앙관요의 백자는 상품 위주로 번조하였다고 생각된다. 중기 백자는 유약에 아주 미량의 철분이 들어 있어 전기의 백자보다 더 담담한 푸름이 깃들여 있고 태토도 순백이다.

표면발색은 아주 담담한 청색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순백색과 같아서 설백(雪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유약은 그물모양의 빙렬이 있는 경우가 많고 표면에 재티가 내려앉아 담녹·담청의 작은 요점(凸點)이 있는 것도 있다.

희고 비교적 굵은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으며, 큰 그릇은 하저부의 용융상태가 나빠서 밑바닥이 거의 자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형은 홀쭉하여 준수한 모습이고 각이 진 형태가 등장하며 항아리의 구연부(口緣部)도 부드러운 각으로 마감한 것이 많다.

조선조의 국가이념이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시점에 이르면 독특한 우리의 특성이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생각되며, 따라서 중기 후반의 백자의 모습은 가장 독특하고 독창적인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중기는 백자의 제식(制式)이 정돈되고 또 백자가 다양화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전기에는 백자로 종묘사직과 기타 제례에 쓰이는 궁중관아의 특수한 제기가 만들어지고 분청사기로도 지방관아나 향교의 제례로 쓰이는 제기가 만들어졌으나, 일반인이 쓰는 백자제기의 제식은 마련되지 않았고 백자제기도 드물었다고 생각된다.

대체로 전기 후반부터 일반인이 쓰는 백자제기의 제식과 백자제기가 아주 조금씩 마련되다가 중기에 들어서 그 제식과 제기가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하며 따라서 백자제기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간결하고 굽이 높은 백자제기는 바로 중기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기에는 문방구의 생산과 세련에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연적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특히 필통이 다양하게 새로 등장하며 기타 문방구가 생겨나고 세련된다. 이것은 역시 국가이념의 한국적인 정착이 독창적인 미의 표현으로 구현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후기(1752~조선 말)

1883년 이후 광주관요의 형태는 도서원이 운영하고 경시인이 판매하는 민영화 시기로 이행되며, 19세기 말부터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값싼 기계생산품이 홍수같이 밀려 들어와 우리나라 자기산업은 황폐일로를 걷다가 단절되고 만다.

후기의 백자도 중기 후반과 같이 상품백자 위주로 생산되었으며 후기 말엽경에 가서 중·하품 백자가 병행하여 생산된 것 같다. 태토는 순백이며, 문방구를 제외한 다른 그릇들은 기벽이 두껍고 유약도 두꺼우며, 유약에는 철분의 함유가 전기보다도 조금 많아 전기보다 더 푸름을 머금어서 청백자라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화도에서 자화가 충실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져서 매우 치밀하고 견고한 백자이며, 유약에는 빙렬이 없고 기포가 많으며 태토와 밀착하여 일체가 되어 절대로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없다. 조선조 500년의 백자 중 가장 견고하고 실용적인 백자라고 생각된다.

기형은 너그럽고 풍만하면서 대접·접시·병 등의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지거나 특별한 모양을 내는 것이 없고, 몸체에도 유려하거나 유연한 곡선이 없이 솔직하면서 단정함을 잃지 않는다.

중기 후반부터 다양해지기 시작한 기종과 기형은 후기에 와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여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면서 새로운 많은 기형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특히 제기와 문방구에서 때로 소탈하고 근엄하고 무게가 있으며 때로 간결하고 익살스럽고 단정단아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형태가 이루어졌다.

중기의 기형은 한국적인 독특하고 준수한 세련미를 보였으며 후기에는 이를 더욱 다양하게 전개시키는 일면 청대(淸代) 도자기문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그 폭이 더욱 넓어졌으면서 청대 도자기의 면모가 조선조의 높은 도자기문화에 흡수되어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면서 익살스럽고 단아하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문양

백자에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그 전통이 오래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태토에 문양을 나타내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번조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백자를 완전히 번조하고 난 다음에 유약 위에 연유계의 저화도 용융채료로 문양을 나타내고 600°∼800℃의 낮은 화도에서 다시 한번 구워내어 연유계의 채료가 백자 표면인 유약에 녹아붙어 문양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번째는 유하시문(釉下施文)이고 두번째는 유상시문(釉上施文)이다.

유하시문으로는 백자에 음각(陰刻, 오목새김: 압인음각도 있음.)·양각(陽刻, 돋을새김: 반양각 및 압인양각도 있음.)·투각(透刻) 등으로 문양을 나타낼 수 있으며 상형(象形)으로 형상을 나타낼 수도 있다. 또한 산화철(酸化鐵)·산화동(酸化銅)·코발트 등으로 문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음각·양각·투각·상형 등은 백자의 태토와 유약에 의한 문양 표현수단이고, 산화철·산화동·코발트 등을 사용하면 백자와는 전혀 다른 채료를 가지고 문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음각·양각·투각·상형 등은 백자 자체 내에 변화를 주지만 순수한 백자이며, 채료로 문양을 나타내면 다른 색에 의해서 그 겉모습이 달라진 것으로 순백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백자는 이러한 유하시문만을 하였으며, 유하시문보다는 아주 문양이 없는 순수한 백자를 더욱 사랑하였다.

중국에서는 연유채료로 문양을 나타내는 유상시문이 금대(金代)로부터 시작하여 원대(元代)를 거쳐 명대(明代) 크게 발전하고 청대에 극성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상품백자에는 거의 전부 유상시문이 있을 정도로 연유채료에 의한 문양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몇 천년 동안 제반 유대가 있었고 교류가 빈번하였지만 명대 이후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유상시문을 한 점도 번조하려고 시도해 본 일이 없다. 우리는 독특하고 독창적이며 우수한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하고 우수한 문화라 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우리 자신은 우리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선별 수용하여 자기화하였던 것이다.

고려백자에는 음각과 양각, 반양각상태의 양각, 투각과 상형 철화문, 퇴화문 및 상감문양이 있다. 이 중 음각문양은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되면서 가장 많고, 12세기에는 양각·반양각문양과 투각·상형·상감문양 등이 상당히 발전하였는데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가마에서 많이 발견된다.

철화문과 퇴화문도 10세기 후반경에는 이미 고려백자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1세기, 12세기 초경의 백자에 많고 12세기에는 오히려 그 예가 드물며 14세기에 가서 소형문양으로 조금씩 등장한다.

고려는 청자가 많이 제작되고 세련된 시대였으므로 백자의 절대량이 청자의 몇 백분의 일도 되지 못하였으며 문양이 들어간 백자의 수량도 많지 않았다. 조선조는 백자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와 청자가 백자에 흡수되고 16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이었으며 그중에도 아주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9할 이상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백자 음각과 양각은 발견된 예가 없고 매우 드물지만 투각과 상형이 있으며, 산화철로 문양을 나타내는 철화문백자(鐵畫文白磁)와 코발트로 문양을 나타내는 청화백자(靑華白磁, 靑畫白磁)와 흑상감의 상감백자가 있었다.

중기에도 음각의 발견례는 아직 없으나 아주 드물지만 양각(양인각)이 있으며, 투각과 상형이 점차 늘어나고, 청화백자·철화백자·동화백자(銅畫白磁, 辰沙白磁)가 있으며, 철화와 청화를 또는 철화·청화·동화 양인각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후기에는 중기부터 다종다양해진 기종과 함께 문양의 내용도 다종다양해지고 문양 표현기법도 그 폭이 넓어졌다. 수량은 매우 적지만 음각이 있고 양인각과 투각 상형이 중기보다 더 늘어났으며 청화백자는 급격히 그 수량이 많아지고 동화백자도 중기말경부터 그 수량이 많아졌으며, 철화문은 증가하지 않았다.

중기에서 비롯된 철화와 청화, 청화와 동화 또는 철화와 동화·청화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양인각과 상형에 여러가지 설채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또 후기에는 전면을 안료로 바르는 청화채(靑華彩)·철채(鐵彩)·동채(銅彩)가 등장하고, 청화채음각·동채양인각·철채양인각도 나타나며, 철채에 청화와 동채와 양인각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드물지만 노태면(露胎面)과 시유면(施釉面)을 같이 이용하여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도 있다.

조선조 백자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다종다양한 기형과 문양이 창출되어 후기 후반경에는 마치 만화방창한 화사한 국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기형과 문양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실용과 기능에 벗어난 예는 거의 없다.

19세기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순백자만을 지향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제반 백자기술을 도입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이 있는 백자도 생산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시각이 점차 확산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여 매우 다종다양한 기종과 문양이 후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순백자에 대한 선호는 끝까지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조 헌종 때의 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우리나라 자기는 결백한 데에 그 장점이 있다. 여기 그림을 그리면 오히려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조선백자는 기능미를 살려서 간결 소탈하고 단정 정직하며 그 속에 유머와 해학이 있다. 언제나 자연스럽고 어딘가 익살스러우며 단순 간결한 데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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