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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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백제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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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백제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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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어의 기원은 부여계어의 하나인 위례홀어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백제어는 마한어(馬韓語)에서 기원한 것으로 주장되어왔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언어외적(言語外的)으로 볼 때 백제의 영토가 대체로 삼한(三韓) 중 마한의 강역에 해당한다는 것과 언어내적(言語內的)으로는 백제어의 특징을 보이는 ‘-부리(夫里)’가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卑離)’의 후신이라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백제는 중부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초기 단계를 벗어나면서 드디어 마한을 병합하였으며, 마한어 기원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부리(-비리)’가 현재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전라북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마한어 기원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백제어의 마한어 기원설을 부정하는 근거로 백제 최초의 도읍지였던 ‘위례홀(慰禮忽)’이라는 지명과 온조(溫祚)의 형인 비류(沸流)가 도읍으로 정한 ‘미추홀(彌鄒忽)’이라는 지명에서의 ‘-홀(忽)’을 지적할 수 있다.

이 ‘-홀’은 마한어의 특징을 가지는 ‘-비리’와 이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백제어가 한계어(韓系語)인 마한어에서가 아니라 북쪽의 부여계어(扶餘系語)에서 기원하였을 개연성을 보이는 증거로 ‘살수(薩水)’라는 지명을 하나 더 지적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부근에 있는 ‘청천(靑川)’의 옛 이름이 ‘살매(薩買)’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을지문덕이 승리를 거둔 살수대첩에서의 ‘살수’가 현재의 평양 부근에 있는 ‘청천강(靑川江)’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지명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반도 중부지역의 최북단에서 고구려어 ‘살(薩)’이 ‘청(靑)’에 대응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대응이 중부지역의 최남단인 청주 부근의 지명에서도 확인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물(水, 川)’에 대응하는 ‘매(買)’가 고구려의 지명 뒤에 붙어서 흔히 사용되었는데, 이 ‘매’가 중부지역 최남단의 ‘청천’의 옛 이름 ‘살매(薩買)’에도 후접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증거 이외에도 몇 가지 예증자료를 더 들 수 있다.

따라서, 백제어의 기원은 한계의 마한어가 아니라 부여계어의 남부지역에서 출발하였으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부여계어의 하나인 위례홀어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어의 시대별 특징은 전기·중기·후기로 삼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전기 백제어는 온조의 건국시기인 서기전 18년으로부터 260년(고이왕 27)에 이르는 약 3세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백제는 단일 언어사회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단일 언어는 앞서 밝혔듯이 부여계어인 위례홀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 남겨준 언어자료는 관직명·인명·지명 등에 한정되며, 대략 수십개의 어휘에 불과하다.

중기 백제어는 261년으로부터 475년(문주왕 1)에 이르는 약 2세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부락국가 체제가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탈바꿈하였으며, 비류왕 초기(324년)에는 도읍을 위례홀에서 광주(廣州)로 옮겼고, 근초고왕대에는 마한을 완전 병합하였다는 역사적 특징을 가지는 시기이다.

이러한 특징에 따라 이 시기의 백제어는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공존하는 복수의 언어사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병합하여감에 따라 백제의 영역내에는 한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한의 언어지역에 부여계어가 막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의 치환이 가능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후기 백제어는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하여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476년으로부터 757년(경덕왕 16)까지의 약 3세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백제가 전국토의 3분의1 이상인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점에서 부여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빼앗겼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제어는 지역적으로 볼 때 단일 언어사회로 복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단일 언어는 전기 백제어와는 달리 한계어인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계층적으로 볼 때에 지배계층의 언어인 부여계어가 피지배 계층의 언어인 한계어에 동화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후기 백제어는 지배족 언어인 부여계어와 피지배족 언어인 한계어가 계층을 이루는, 이른바 계층언어 사회의 특징을 갖는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계층언어적 대립의 존재에 대해서는 희미하나마 약간의 문헌적 방증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주서 周書≫ 이역전(異域傳)에 “왕의 성은 부여씨인데 ‘어라하(於羅瑕)’라 하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 부른다. 중국어로는 다 왕이란 말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어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본백제지명(本百濟地名)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일본 자료로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나오는 백제관계 기사들이 주목된다.

우리가 현존자료를 가지고 재구할 수 있는 백제어의 단어는 명사 53, 형용사 11, 동사 10 등 78여어에 한정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어의 형성과정이 지극히 복잡하여 이들 어휘가 백제어사의 전기·중기·후기 가운데 어느 시기에 해당할 것인지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들 지명에 의하여 그려질 수 있는 판도가 문주왕의 공주천도 이후에 축소된 모습을 보이므로 더욱 그렇다. 아마도 78여의 단어는 대부분이 후기에 해당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면 보다 이른 시기인 전기(혹은 중기까지)의 백제어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전기 백제어시대의 판도는 사실상 지금의 경기권과 이곳에 인접한 황해도와 강원도 일부 그리고 충청도의 북단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기 백제어는 위와 같은 판도내의 고지명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가 빼앗긴 지역이자 고구려의 후기 판도(점령지역)의 지명에서 백제 지명으로 찾아낸 것이 122개이다. 앞으로 이 소중한 자료를 통하여 전기 백제어의 단어를 재구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참고문헌

『국어사연구』(김형규, 일조각, 1963)
『국어사개설』(이기문, 민중서관, 1972)
『백제어연구』(도수희, 아세아문화사, 1977)
『백제전기의 언어에 관한 연구』(도수희, 지식산업사, 1982)
「백제어연구와 자료면의 문제점」(이숭녕, 『백제연구』 2, 1971)
「백제지명연구」(도수희, 『백제연구』 10·11, 1979·1980)
「백제전기의 언어에 관한 제문제」(도수희, 『진단학보』 60, 진단학회, 1985)
『백제어연구』 Ⅰ(도수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7)
『백제어연구』 Ⅱ(도수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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