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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社會)

사회구조개념용어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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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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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사회를 보는 눈
  1. 1. 사회해부학적 접근방법
    한국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의 풍속·기후·인구·교육 등의 여러 측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특성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문화인류학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특성들이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만이 아닌 다른 사회의 문화양식과 비교할 때 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은 여러 문화가 서로 차이를 갖는다는 점에 관심을 두면서도,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사회해부학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구조에 대한 일반 개념이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 들면 한국 사회라는 형성체 자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구조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혀야 한다. 사회구조의 개념은 바로 이러한 뜻으로 필요하게 되며, 사회해부학이라는 말도 이러한 뜻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회해부학은 동물해부학이나 인체해부학과 같은 것은 아니다. 대상의 구조를 정확하게 밝힌다는 목적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해부의 대상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처럼 다른 점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의 생물학적 구조는 불변인 데 반해서 사회는 역사 과정에서 시대마다 그 구조를 달리해 오고 있다. 따라서 사회구조는 늘 변화 속에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사회해부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시대마다의 고유한 사회구조를 해부학적으로 밝힌다는 것으로, 시대마다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의 특징을 이념형(理念型)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말한다. 중세 사회구조를 밝히는 사회해부학이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밝히는 사회해부학도 있는 것이다.
  1. 2. 한국사회구조를 설명하는 두 개의 요인군
    사회구조는 집단구성원 사이의 역할 분화(役割分化)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 분화의 기준이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리고 그 기준의 실행은 어떤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고유한 방법이 사실상 사회구조의 형성과 문화내용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전체를 한 사회의 특성이라고 하는데, 넓은 의미에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두 개의 요인군, 즉 지배관계 요인군과 역할분담관계 요인군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① 지배관계 요인군:고조선시대 이후 우리 나라 권력의 소유자들은 모든 피지배자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제정, 강요함으로써 지배의 구조를 형성해 왔다. 현재까지도 개인의 사회생활에서 잠재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분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으로는 신분제도의 성립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그랬지만 조선의 개국 초기인 1394년(태조 3)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성안해서 국가의 기본 규범으로 선포한 이후 조선 전통사회에서 신분과 역할 분담의 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기본 규범이 성립됨으로써 지배자는 적법적으로 백성의 복종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을 제도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조선의 사회구조에 대한 틀이 이때부터 잡히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태조는 개국 초부터 새 정률(定律)을 제정하고 개국공신을 분류하며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하고 있었던 터라, 지배층은 이미 새로운 윤곽이 잡혀 가고 있던 조건 아래에서 1395년 과거식(科擧式)을 상세히 규정함과 동시에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세워 하층 피지배층을 관리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조선 사회구조의 재편성을 왕권의 힘으로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시대의 사회구조는 신분에 따른 계위구조(階位構造)의 특성을 띠게 되었다.
    양반·중인·상민·천민이라는 사민으로 구성된 엄격한 구분에 따른 신분질서는 조선 사회의 구성요인으로서 사실상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원칙적으로 신분간의 사회 이동이 불가능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과거제도를 통한 양반 지배층 내부에서의 관료 충당현상에서도 매우 폐쇄적이었으며 세습성을 농후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서 관료구조의 최상층인 삼의정(三議政)을 과거를 통해 충당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한 가문의 4대 조까지의 입과(入科) 및 역관의 빈도에서 삼의정 집안 출신의 90.9%가 과거에 합격하고 있고, 문과합격률은 전체의 87.9%를 점하고 있다.
    과거제도가 광범위하게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는 원래의 뜻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낱 명분에 불과하였고, 광범위하게 인재를 등용한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에 속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사회는 대단히 경직화된 신분사회였다. 그것은 동시에 관료 신분에서 파생하는 권력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중앙집권체제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언제나 왕실 집중적인 방향에서 작용하였다.
    이상과 같이 권력 지배관계가 신분제도를 고정화하면서 인간의 사회적 존재양태를 결정한 나머지 모든 사회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라는 본질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관계는 기본적으로는 가족 및 씨족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군(君)과 신(臣)의 관계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② 역할분담관계 요인군:역할분담관계 요인군은 그 구조가 형태면에서는 지배관계 요인군에 의해서 규정되는 면이 많으나, 그 원형은 역사적으로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배관계가 단기적으로 형성되는 반면 역할분담관계는 고대 사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예컨대 무속종교 같은 것은 장구한 시간을 두고 한국 민간신앙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수 신분에 의해 흘러 내려오면서 외래 문화와의 교류 속에서도 비교적 짙은 토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문화의 실질적인 내용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전 과정을 통괄하는 가족과 씨족이 만들어 낸 삶의 공동체에서 규정된다. 가족의 서열관계가 생물학적 근거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극히 자연적인 현상과 오륜사상적 가족서열관이 서로 일체화되어 가장 기초적인 도덕규범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조선시대 국가가 이룩했던 가치관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문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치관의 통일은 그 내용에서는 오륜사상에 의한 불평등한 역할 분담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고, 그것이 또한 생물학적 질서와도 조화를 이루면서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 도덕적·문화적 원기(元基, mores)로 남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유교문화사회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내용은 따지고 보면 정치적 지배관계라는 형식을 메우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사회변화의 특성
  1. 1. 서구의 일반이론
    19세기 중엽까지는 앞에서 말한 지배관계 요인군과 역할분담관계 요인군이라는 두 개의 측면이 일체화되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체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인적 요인군들과 외인적 요인군들에 의해 조선 전통사회체제는 19세기 초반부터 동요와 해체 과정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체제 동요와 해체를 사회변화 또는 사회구조변동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회변화 과정을 서구 사회경제사에서는 근대화 과정이라고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사회 변화의 특성을 비교사회사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서구 사회에서 생성된 근대화의 일반적 특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 특히 영국 사회에서 근대화란 처음부터 왕권지배국가에 대해 대립하는 시민계급의 등장과 그들의 자율성 획득이라는 과제를 성취하는 과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기에 홉스(Hobbes,T.)에 의하면 시민사회란 법에서나 경제활동에서 계약에 따라 목적합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총합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퍼그슨(Fergson,A.)은 시민사회(civil society), 스미스(Smith,A.)는 국가에서부터 독립되어 있는 상품 ‘교환사회’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회’에서부터 ‘교환사회’로 변하는 물질적 기체(基體)는 국가의 영역 밖에서 움직이는 경제였고, 이것이 시민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절대주의 국가에서부터 사회와 경제가 분리되어 나와서 사회와 국가는 양분, 병립하게 되었다. 이는 물론 자본주의가 시민계급에 의해서 발전된 나라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던 독일 같은 나라에서의 시민사회의 개념은 좀 다른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헤겔(Hegel,F.)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의 시민사회에 대한 논리는 사회 전체가 변증법적으로 테제[正], 안티테제[反] 그리고 진테제[合]의 형식으로 파악되어 가족(正), 시민사회(反), 그리고 국가(合)라는 형태로 발전된다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마르크스(Marx,K.)도 헤겔의 변증법 논리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계급 대립이 혁명에 의해서 지양된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버렸다. 마르크스의 논리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동태에 초점을 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이라는 계급투쟁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
    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프랑스혁명, 즉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평등·동포애에 대한 이상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법적인 권리의 평등은 구현되었으나 경제에서는 새로운 불평등이 구조화되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이상사회 이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공업적 생산양식이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공장 형태의 대규모화를 초래하였고, 이로 인한 노사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화되어 사회적 갈등이 자본주의체제 내의 구조적 요인으로 발생한 데 있었다.
    스미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소규모 공장 대신에 거대한 생산체가 발생함으로써 새로운 지배세력도 발생하였다. 이로써 계급사회가 나타난 것이다. 계급사회의 본질이 자본과 노동이라는 생산요인이 대립관계에 선다는 가정 아래에서 성립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특성에서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외의 계급이나 계층은 사회변화 또는 혁명을 위해서는 종속적인 역할밖에 할 일이 없다고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사회인식은 결국 역사철학적 계급이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지 사회변화의 현실을 증명해 주는 이론은 아니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실상을 역사적으로 개관할 때 서구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에 입각할 수 없다는 점이 부각된다.
  1. 2. 사회변화의 다층적 요인군
    한국 사회는 역사 과정 속에서 변화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전체 사회가 동시적으로 변화해 온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그 변화 과정에서 역할 분담이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요인군들이 두 개로 분류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이 분류를 시간적 연속성이라는 차원에서 또다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기본적 사회형성체㈀, 둘째 한 시대의 산물로서의 사회구조㈁, 그리고 셋째는 시사적(時事的)·정치적 상황㈂이라는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에 해당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요인들로서 가족제도, 성의 차이에 따른 역할 분담, 조선시대에 확립된 중앙집권적 행정조직, 그리고 조상숭배의례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것은 오륜사상과 그 도덕률이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통시대적으로 계속되어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잠재적으로나 현재적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그 원형을 조선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에 해당하는 것은 개항 이후 교통의 발달과 공장과 근대적 회사의 발생 등 새로운 형태의 사회관계와 구조를 형성하는 요인군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아직은 맹아상태에 있었고, 자본주의적 구조와 기능이 사회 전반을 재편성하는 동력이 될 수는 없었다.
    전통적인 우리 사회가 그 심부에서부터 해체되고 재편성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일본인의 통감부(統監府)가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1910년 강제 합병, 즉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였다.
    1910년부터 1918년에 걸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들은 토지제도를 근대화한다는 구실 아래 조직적·폭력적으로 토지를 자신들의 소유로 전환시켰다. 대표적인 조직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였고, 이 회사의 토지 소유 실태를 보면 1910년 11만355정보에서 1930년에는 123만5654정보로 20년 동안 10배나 증가하였다.
    이러한 토지 소유 증가현상은 기본적으로 약탈하는 방법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소작농가의 증가와 이촌(離村), 유민현상이 일어났다. 통계적으로 보면 1914년에서 1925년 사이에 소작농가는 전국적으로 97만1208호에서 121만7887호로 늘어났으며, 이로써 총경작지면적에 대한 소작지 면적의 비율은 50.2%(1919)에서 55.6%(1930)로 증가하였다.
    이촌·유민은 1925년 한 해만 해도 15만112명의 농민이 이농을 하고 있으며, 1932년에는 이농민이 16만6549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중 걸식하는 자가 1927년에는 4만6299명이었으나 1930년에는 5만8204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제 침략으로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었던 1920년대 초반 우리 나라 농촌의 사회관계는 단시일 내에 붕괴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적 자본주의 발달사나 근대화이론에서 설명할 수 없는 국권 상실과 외세의 폭력에 의한 사회 해체현상이었다. 따라서 해체의 기초 위에서 식민지적 수탈체제가 확립되어 갔던 것이 1945년까지의 한국 사회 변화 과정에서 보여준 특성이었다.
    이와 같은 식민지 수탈체제 형성 과정으로서의 한국 사회구조의 변화는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1945년 이후의 사회변화는 광복과 국토 분단이라는 요인에 의해서 규정되는 새로운 의미의 구조변화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사회가 일시에 혼란상태에 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의 사회구조는 공업화라는 새로운 단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이때 이후의 사회구조 변화는 공업화의 결과였다. 한국 사회의 미래상은 이 선상(線上)에서 전개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 대해서 말하자면, 최근의 한국 사회가 보여준 변화는 시간적으로 단기간 계속된 정치적 사건들에 의해서 조성되는 사회적 상황이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유신, 10·26사건, 5·17사건, 6·29선언, 제6공화국 출범, 문민정부 탄생, 국민의 정부 등장 등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전체 사회의 분위기를 좌우했던 요인들이다.
    이러한 단기적인 시사·정치적 상황은 당연히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야기시키는 것이지만, 특히 청소년들의 의식과 행동은 외국 문화의 이식으로 활성화되고 촉진되면서 기성 세대와의 사회적 거리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세대간 갈등현상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전통사회의 해체와 문화의 연속성
  1. 1. 한국문화의 원형
    한국 문화의 원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설명한 ㈀ 요인군에 해당한다. ㈀ 요인군의 작용 시한은 거의 항구적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의 원형을 여기서 찾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통치 특색은 상당히 법치주의적이었다. 『경제육전』·『육전등록 六典謄錄』·『경국대전』·『속대전』 등 끊임없이 법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법 개정이 발전된 법 이념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조종성헌(祖宗成憲)을 영구히 준수한다는 기본 원칙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법 개정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은 보편적 당위성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입법 주체의 권위를 객관화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법치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삼강오륜사상(三綱五倫思想)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 대해서는 윤리교육적 방법으로 삼강오륜적 도덕률을 생활화시키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전반을 통해서 일반인 전체를 위한 생활윤리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를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책은 세종의 명에 의해서 6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의 책임 아래 편찬되어 1434년 특별 교서와 함께 반포되었다. 그 뒤 이 책은 1797년(정조 21)까지 11회에 걸쳐 재판, 인출되었고, 언해본(諺解本)도 많이 간행되었다. 이것으로 볼 때 왕조는 유교도덕의 생활화를 매우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간인 수준에서는 『효경』도 중요한 윤리 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효경』의 언해본이 널리 읽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중국 철학사적으로 보면 『효경』은 오륜사상에 입각한 행위 규범이다. 공자(孔子)와 증자(曾子)의 효도설을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요성은 가장 넓은 영역에 걸쳐 유교적 도덕의식을 전파했다는 것에 있지만, 특히 효(孝)의 논리를 세웠다는 데 있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잘 간수하는 것이 효의 전제조건이라고 하면서 효의 실천은 부모를 잘 모시는 데서부터 시작하며[始於事親], 그 다음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中於事君], 마지막으로 입신양명하는 데[終於立身] 있다고 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입신의 가능성이 과거를 통과해서 관리로 임명되는 길밖에 없다는 조선시대의 사회적 상승기제(上昇機制) 밑에서, 그 기회는 양반층에만 배타적으로 한정되는 것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군을 통해서 입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군과 입신은 동전 앞뒤 면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사친과 사군·입신이라는 두 단계가 본질적이다.
    사실 전통사회에서의 사친은 보편적 도덕률로 이해되고 있었지만, 사군이나 입신은 선택된 사람에게만 가능했고, 또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데 속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사친과 연계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조선 사회의 윤리의식과 권력의식이 서로 분리되는데, 그것은 신분사회의 실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사친과 사군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 가치가 병립하면서도 결코 갈등관계로 발전하지 않았던 점이 조선시대 전통사회의 사회 통합을 이루는 관건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사회를 관인사회(官人社會)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근거에서이다. 그래서 관인사회가 우리 사회의 원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 2. 양반사회의 형성과 실태
    조선시대의 사회에서는 입신양명의 관문이 원칙적으로 과거라는 시험제도밖에 없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는 입시 자격에 신분적인 제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수학조건을 갖추었던 양반 출신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과거입격(科擧入格)은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는 최고의 가치로서 양반사회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조선 전통사회에서 과거제도가 어떠한 사회·경제적 결과를 자아냈는가 하는 것은 조선 전통사회의 본질적 특성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한 개인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소과(小科)나 대과(大科)에 입격하게 되면 그 사람의 집안은 양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씨족 중에서 입격자를 내지 못했거나 비록 입격했어도 실제로 입사(入仕)를 하지 못하면 양반의 신분을 가지면서도 관직에 의한 재산 증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생존의 물질적 토대로서 이미 획득한 토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 양반은 이와 같이 해서 지방의 지주 세력이라는 경제적 특징으로 전환해 갔다.
    그러나 동시에 양반층 내부의 일부에서는 과거를 통과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양반층 내부의 대량 하강현상과 일부 상승현상의 교류가 대한제국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연한 결과로 하강 양반층 속에서 상민화(常民化)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양반 신분의 매매현상이 그것이었다. 박지원(朴趾源)의 풍자소설 『양반전』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록, 상민화현상이 발생하고 그것이 조선시대 신분사회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해도 여전히 절대 다수의 양반들은 관리후보층으로 남았다. 그런가 하면 숙종·영조 때 와서 나타난 상민층의 양반화현상과 더불어 결과적으로 관리후보층만 팽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리후보층의 팽창현상은 계속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관리후보층은 자산을 확대 재생산할 경제적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관양반(無官兩班)으로서 궁핍과 차전생활을 이어가면서 요행과 행운, 즉 관직을 얻어 일시에 가난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10년 또는 15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관·현직자를 찾아다니면서 청탁하는 일이 많았는데, 사랑(舍廊)이라는 객실에서 대관·현직자를 만나기 위해 무리를 이루고 대기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실력 있는 고관집에 200∼300명이 면회 기회를 얻기 위해서 움츠리고 앉아 있는 광경도 벌어졌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일상어로 쓰이고 있는 엽관운동(獵官運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절대 다수는 행운을 얻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농업·상업·기타의 수입활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공업화 조짐도 없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새로운 직업이 발생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관리후보층의 빈궁상태는 생존 최저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객관적 사태는 이렇다 하더라도 신분사회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붕괴되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국가가 종국적으로 탈권될 때까지 새로운 반체제 세력이 등장해서 체제 교체를 이룩하지 않았다는 조건 아래서는 그래도 기존의 관료체제 속에서 출세한다는 것이 사회적 가치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원래 관직이라는 것은 대체로 2년을 기준으로 해서 교체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지방 관리가 그 지방에서 뿌리를 박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중앙에서도 사정은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지방을 막론하고 관료층과 일반 백성층 사이에는 언제나 사회적 거리가 있었으며, 관료계급 또는 관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집단이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관료를 지낸 사람이 관직을 그만두더라도 그 신분은 양반으로 환원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관료층은 성립되지 않았더라도 양반층이라는 신분 집단은 존재할 수 있었다. 당시 양반은 과거에 입격해서 관직을 갖게 되면 입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직의 권력으로 재물은 물론 공전(公田)까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관료적 지주라는 특유한 형태가 발생했는데, 이 사유화된 공전은 세습되어 씨족의 소유물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 관료적 지주가 발생했는가 하는 문제는 제도면에서 설명할 수 없으나 권력의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관료적 지주의 발생은 관직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나 그 발생형태는 다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종합되어 결과적으로 농촌지주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전통 신분사회의 본질을 규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도 설명될 수 있다.
    먼저, 현직 관료집단의 존재를 전제해서 말하면 이 집단의 생활세계는 사군(事君)의 영역이 된다. 이 세계는 법에 의해서 엄격하게 행동이 통제되는 세계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왕권이 직접 통제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일단 관직을 내놓는 순간부터 그는 양반으로 환원되어 씨족세계로 돌아온다. 『효경』에서 말하는 효의 원점, 즉 사친의 차원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사군·입신양명은 명목상의 권위로 남을 뿐 실질적으로 씨족공동체가 존재의 근거가 될 뿐이다. 사친(事親)은 영원하고 사군은 한시적이라는 말이다. 이 두 개의 도덕률이 삼강(三綱)으로 통합되어 표시되고 있지만, 왕권이 개입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친 영역과 사군 영역은 별개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사회적 존재를 위한 물질적 토대로서의 토지가 사유화되어 있다는 기본 조건 아래에서 재산의 근거는 원칙적으로 토지일 수밖에 없다.
    유교적 이념과 가산의식이 결합된 형태로서의 가부장제도에서 가장은 가족생활 전체를 대외적으로 대표할 뿐만 아니라, 가산을 처분하고 사용에 따른 결정을 하는 주체였다. 이때 가산이란 토지와 노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토지와 노비의 소유는 한집안의 조업(祖業)을 이어받고 연속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연속성은 적자상속제에 의해서 보장되었다.
    그러나 적자 상속이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직계 자녀에 대한 상속 또는 증여까지 포함된다. 그 당시의 씨족문서 가운데 흔히 상속·증여에 관한 문언(文言)에서 볼 수 있는 물급손외(勿給孫外)니 부득여타(不得與他)니 하는 말들은 직계 자녀 상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상용어 ‘자손대대’라는 말의 뜻은 바로 이러한 형태 속에서의 가산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륜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기본 준칙이었다.
    토지나 노비를 자손대에 가서 손외자에게 매도하는 것을 금하는 일은 어느 가문이나 지키지 않으려는 집안이 없었다. 만약, 가산이나 노비를 손외자에게 매도하는 경우 관에 고발하여 불효죄로 단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가산의 연속성을 지킨다는 것은 효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직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4촌까지 상속받을 수 있었으나, 4촌도 없을 때는 그 재산이 국가에 환수된다고 『경국대전』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4촌 이내에서 상속·증여된 재산은 완전히 상속받은 자의 개인 소유로 확정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개인 소유로 된 재산을 기물(己物)이라고 하였다. 재산개념으로서의 기물의 개념이 유별나게 『경국대전』에 분명하게 규정지어져 있는 것은 서구 가부장제도에서의 재산 개념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조선시대의 소유 개념은 ‘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소유는 개인을 주체로 한다는 관념이 일상화되었다. 대상물을 포괄적으로 인격화된 존재에 귀속시키는 개념이 기신(己身)·기명(己名)·기자(己子)·기노(己奴)·기족(己族) 등 일상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나의 소유물로서 내가 사랑하고 간직하는 것은 모두 ‘나’와 같은 것으로 보는 의식이 유별나게 강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 소유 개념이 가부장제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특별히 발달했다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의 재산 개념을 이기주의적인 의식으로 흘러가게 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私) 또는 사유의 개념은 국가에 의해 재산을 운영 관리하는 영역과의 긴장된 대립관계 속에서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농촌·씨족공동체에서는 토지, 기타 시설물을 공유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것을 공적 존재로 의식했다기보다는 문중(門中) 또는 마을의 소유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유 개념하고는 조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반해 관아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관리하고 있는 공적인 것과는 대립되고 있었다는 문맥에서의 이기주의라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공가(公家)와 사가, 공사와 사사, 공죄와 사죄, 공물과 사물의 구별은 개인과 국가와의 대립 속에서 발생하였다. 이때 국가란 일반 서민에게는 관아를 의미했지만 우리 나라 전통사회를 사회사 차원에서 이해하는 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점은 여기에서 말하는 사라는 것이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사회경제적 조건이 없었기 때문에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이 태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1. 3. 문화적 이중구조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핵심이 관료 지배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군(事君)하는 체제와 기능의 형식이 양반사회의 제일차적인 규범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현상은 이 형식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상징했으며, 온갖 체제가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이때 조선시대 체제기능의 형식에 대한 비판으로서 실학사상이나 북학사상(北學思想), 그리고 개화사상 등 일련의 체제 근대화사상들이 발생하였다.
    이 사상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분제도의 모순에서 오는 체제 붕괴를 막고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이상적인 유교체제를 재활성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재활성화 노력은 전통사회가 현대사회로 전환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 사회의 근대화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서구 사회에서는 산업혁명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나타난 새로운 생산양식이 전체 사회구조를 재편성하는 기본 동인이 되고, 이에 따라 전체 사회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 전통사회에서의 근대화 사상들은 관료 지배의 현실(예컨대, 삼정문란)이 원래의 유교적 이념형에서부터 이탈되어 있는 상황을 비판하고 시정하는 가운데 체제 개편의 필요성을 제시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선 말기의 일련의 근대화사상들은 왕권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근대화사상이 아니라, 체제를 유신해서 체제의 이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었다. 예컨대, 정약용(丁若鏞)의 ‘신아지구방사상(新我之舊邦思想)’은 본질에서는 유신사상이지만 방법론으로서는 농촌사회관계 합리화방법론이었다.
    그가 시유림만보(詩楡林晩步)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면 모름지기 농촌 문제부터 잘 풀어야 한다는 농민 위주의 사상을 피력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가 어떤 방법으로 농촌의 재건을 계획했는가를 보면 실학사상적 근대화론의 체제긍정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그의 농촌정책을 여전제(閭田制)에서 보면, 30호를 일려(一閭)라는 농업 작업 단위로 하고 동시에 이 단위가 병역의 단위가 되게 하여 부력(富力)과 국력(國力)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제안은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려는 철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제의 결함을 수리하고 활성화하려는 데 있다는 점이다. 특히, 기존의 신분관계나 사회관계에 변화가 있어야 하겠다는 의도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는 사회계층 문제를 논하는 대목에서 직접 농사를 짓지 않은 집단[不爲農者], 다시 말해서 공장(工匠)이나 상인계급의 존재에 관해서 언급하면서도, 이 계급들이 전통신분적 사회관계를 해체하는 기본 세력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공업적 생산양식이 사회변화에 대해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는 그 당시의 근대화 사상가들에게는 중요한 준거 기준이 될 수 없었다는 사회·경제사적 제약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아지구방’이라는 그의 근대화 사상은 부르주아지[不爲農者]가 주축이 되는 근대화론이 아니라, 신분사회적 사회관계의 양기능화를 의미했다.
    정약용의 농촌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 심도가 깊었기 때문에 얼른 보면 체제 극복의 논리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것은 그때 사회관계의 모순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지, 구 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근대사회 건설을 구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계몽주의적 사상가이기에는 역사철학적·인식론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른바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관련해서 진보주의적 사상의 영도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사회 현실에서는 신분적 불평등구조가 확고했고, 의식면에서는 유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인식론적 도전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조선시대의 체제가 내적 요인에 의해 붕괴하는 힘보다도 더 강한 외적 요인이 작용하여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사상형태는 실학사상의 준거틀을 넘어서 국제관계에까지 그 시야를 넓히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화사상이다. 그래서 개화사상은 그 인식론적 기초가 어떠했든 간에 한마디로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이었던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근저에는 국가 위기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표출했던 것이 1884년의 갑신정변이었다. 이런 뜻에서 갑신정변의 사회사적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의식면에서 사친의 세계와 사군의 세계가 이중구조를 이루면서 존재해 왔고, 또 그것을 실학이나 개화사상이 지양(止揚)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는 서양 근세사상에서 볼 수 있었던 개인의 독립, 시민의 자율사상이 발생하지 못했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정약용이 비록 농촌생활을 비판했다고는 하나 그 자신을 농민과 일체화하지 않았으며, 또 양반 신분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궁극적으로는 국왕의 신임을 뉘우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약용의 세계관이 개화사상에서 극복된 흔적도 없다. 이 점은 철학인식론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조선시대 체제의 실존과 유교사상의 건재라는 현실 조건 속에서의 왕권의 이신(以新)과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적·기능적 지식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근대화 문제가 기술과 기능에 관한 지식의 문제로 압축된다면 정부가 할 일이란 개화된 강국에서부터 그것을 얻어 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귀결점은 외국 세력의 국내유입과 이권을 둘러싼 그들의 각축전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실질적인 주권이 형해화되어 간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 백성이나 지식인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의 붕괴 과정 그 자체였고, 그래서 개인의 확립, 시민의 권리 옹호와 같은 근대화의 정치·법제적 문제보다는 오히려 국권 수호라는 방위적 의식을 일반화하게 하였다.
    개화사상의 뒤를 이어 등장한 의식형태가 심리적으로 외족 증오감에 입각한 척사사상이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시에 척사사상은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침입 과정에서 국권의 붕괴와 더불어 의식면에서 사친의 세계와 사군의 세계의 분리·분열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로써 국가가 결정적으로 거세되어 가는 속에서 현실적으로 의식면에서 사군의 세계를 단념·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 의식 영역을 사친세계로 한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사친세계라는 씨족권 내에서만 생존의 문제, 민족의 문제,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가 현대적 사회구조를 형성해 가는 데서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다. 사친세계와 사군세계의 병립이 그나마도 국권에 의해서 통합되어 사회 통합의 원천을 형성하고 있던 전통사회가 근대화의 출발점에서부터 사회 통합의 구심점, 다시 말해서 왕권의 약화 내지는 상실을 가져와 끝내는 시민사회의 장(場)인 ‘사회’의 터전을 형성하는 계기를 박탈당하게 된다.
    따라서 20세기 이후 우리 사회의 제도 및 의식구조는 철저하게 외세 지배라는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체제 자체가 식민지체제로 변질해 가는 과정에서 흔들리는 사친세계와 사군세계 사이의 통합을 유지, 회복하겠다는 운동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갑신정변·갑오동학농민운동·반일의병활동·국권회복운동으로서의 국문(國文)운동·언론운동 등 일련의 항쟁과 평화적 운동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들은 모두가 시민의식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다기보다는 사라져 가는 사군세계, 즉 국가를 회복하겠다는 데 시민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의 제한성이 있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운동처럼 시민성이 강했던 운동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나마도 왕권이 시민운동에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 수구 세력의 압력 때문에 정치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회의식면에서는 반외세의식이 새로운 행동규범으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확하게 말해서 과거의 사친세계와 사군세계의 병립구조가 파괴되고 새로운 차원에서 사친세계와 침입국가체제, 즉 외세지배체제와의 대립구조가 사회생활면에서나 민족의식면에서 형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 4. 전통사회의 붕괴
    1905년 일제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우리 나라 사람으로부터 사군세계를 빼앗아간 일제는 3단계에 걸쳐 한국 사회를 강권적으로 재편성하였다. 이 과정은 일관해서 총독부의 한국인 수탈체제를 확립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통 우리 나라 사회는 타율적으로 해체되고 재편성되었다.
    먼저 그 3단계를 내용면에서 구분하면, 1단계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농촌수탈체제가 확립된 1906년부터 1918년까지이고, 2단계는 일제 상품시장의 확대 및 일본 공업을 위한 원료(식량 포함) 공급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며, 3단계는 전시 수탈과 동원체제가 확립된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1단계가 시작된 것은 1906년 2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부터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로 포츠머스조약에서 한반도 통치를 승인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식민지화방법은 처음부터 무단적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사실상 1945년까지 계속된 셈이다.
    원래 일제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와 중국까지 침략할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그들의 의도 구현 여하는 일본이 추구하는 대륙정책의 시금석이 되는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한반도 통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은 농민이 전체 인구의 8할 이상을 점하고 있고, 한반도 전체의 존속이 절대적으로 농업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농촌사회관계를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전통적인 자급자족 경제구조를 허물고 그것을 화폐경제체제로 편입시키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급한 문제는 조세제도를 확립하는 일이고, 토지제도를 근대화 해서 토지를 자본화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대륙정책을 돕기 위해서 한반도 내에서의 군사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교통과 통신시설을 확충해야 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통감부는 「토지가옥증명규칙」을 제정하여 토지 및 가옥의 소재를 확인하고, 한국을 강제 병합하기 전인 1910년 3월 통감부가 이미 꼭두각시 정부로 전락해 있는 우리 나라 정부에 토지조사국(土地調査局)을 설치하게 함으로써 토지 강탈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강제 합방 직후인 그 해 10월 이른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1912년 8월에는 「토지조사령」 반포로 부동산등기와 증명에 관한 규정을 공표했으며, 1918년 11월에 가서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전통사회를 타율적·원칙적으로 붕괴시켰다. 이 토지조사사업은 먼저 두 가지 측면에서 구 체제의 생산수단 소유관계를 해체시켰다.
    첫째, 조선시대 이후 내려온 국유지를 총독부 관리로 전환시켰는데, 이것은 사실상 우리 전통사회의 경제적 척추를 빼앗긴 것이었다.
    둘째, 국유지 이외의 토지로서 관습적으로 씨족 및 촌락 공동 소유로 되어 있지만 개인 소유의 한계가 뚜렷하지 않은 토지와 미개간 방치 토지에 대해서는 모두 ‘국유지로의 편입’조처를 취하였다.
    「토지조사령」이 얼마나 강탈적이고 기만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토지조사를 신고제(申告制)라는 형태로 시행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절대 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고 행정력이 직접 미치지 못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과, 강제 합방 이후까지 계속되었던 반일무장 의병활동 때문에 삼남지방의 많은 농촌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고제라는 것은 토지를 강탈하는 방법이 얼마나 간교했는가를 말해 준다.
    예컨대, 「토지조사령」 제4조 및 제5조를 보면 많은 문맹 농민이 토지소유권 등록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4조는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그의 씨명 또는 소재지의 명칭 및 소재지·일자·번호·목표·등급·지적·결수를 임시토지조사국에 신고하여야 한다.”, 그리고 제5조는 “토지의 소유자 또는 임차인, 기타 관리인은 조선총독이 정하는 기한 안에 그 토지의 사위(四圍)의 강계(彊界)에 표침을 세우고 지목 및 지번호, 그리고 민유지에 대해서는 소유자의 씨명 명칭, 국유지에 대해서는 보관청명을 기재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문맹농민 혼자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문맹자는 자연히 관청 근처에 오가는 사람들이나 글자깨나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간에 농간을 부리는 사람들도 많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토착양반 세력들은 총독부 행정에 영합해서 그들에게 유리하게 신고를 했다. 그래도 소유자가 신고제를 통해서 등록되지 않은 토지가 남아 있는 경우 그것은 일본인 차지가 되기 일쑤였다.
    한 일본인의 글이 그것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손에는 망원경을 쥐고서 아침에는 동교(東郊)에 천무(千畝)의 토지를 병점하고 저녁에는 서면에 만경(萬頃)의 수전을 겸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곧 우리 나라 사회의 계급구조를 그 밑바닥에서부터 동요시키기 시작하였다. 토지조사가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914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사이의 농가 호수별 계급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변하였다.
    전체 농민 인구면에서 보아 1914년 1.8%밖에 안 되는 지주계급이 35.1%를 점했던 농민(주로 소작농민)을 지배했다. 그런데 1919년이 되자 지주가 3.4%로 늘었을 뿐만 아니라 소작인도 37.6%로 늘었다. 이러한 사실은 자작 및 소작을 겸하고 있는 영세농가층의 축소와 이농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자작 및 소작을 겸하고 있는 농가가 1914년 41.1%에서 1919년 39.2%로 감소하고 있는 데서 추정할 수 있다. 단편적인 것이기는 하나 1925년 한 해만 해도 이농하여 전업한 농민이 2만372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 농촌사회관계가 새로운 농촌사회관계로 전환되면서 양극화현상을 나타낸 것을 의미하며, 농업인구의 계급화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작 및 소작 농민층이 감소하는 경향은 지주층의 증대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동시에 지주층 내부의 분화·분열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지주층 내부에 분화·분열현상이 나타난 가장 원천적인 요인은 총독부가 토지를 약탈하는 데 하수역할을 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위장적 근대적 회사와 일본인 농민의 대량 이주를 통해서 그들을 지주층으로 만들어 낸 데 있었다.
    이 회사는 출발 당시부터 토지 측량에서 사기를 시작했으며, 각종 토지 약 10만 정보를 편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1930년이 되자 이 회사 소유의 토지가 무려 123만5654정보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침식이다.
    동시에 일본인 지주의 형성을 보면, 한 예로서 총독부는 1926년 한 해만 해도 4,025호(약 2만 명)의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850여 정보를 이들에게 양도하여 지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총독부의 토지강탈정책 실시 결과 1914년에서부터 1925년 사이에 우리 나라 사람 소작농가호수는 97만1208호에서부터 127만7887호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내 전국 총경작지 면적에 대한 소작지 면적 비율은 50.2%(1919)에서 55.6%(1930)로 늘어났다.
    그래서 소작인으로 남아 있는 것 자체도 점점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계속 소작을 하게 되더라도 소작조건이 까다로워졌다. 일본인 지주들(개인 또는 회사)은 계약서에서 종자와 품종을 지주가 지정하고 비료의 용량과 종류까지도 농업 지도라는 명목하에 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의 위반은 곧 해약을 의미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작료를 정하는 방법이다. 일반화되어 있던 소작료 책정방법은 정조(定租)·타조(打租)·집조(執租)의 세 가지였지만, 일본인 지주들은 예외없이 타조와 집조라는 유리한 조건을 택하였다. 그 결과 타조지에서 탈곡한 후 그것의 5∼6할이 지주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소작농업의 영세성과 기술의 낙후성 때문에 일반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생존 최저선을 맴돌고 있었다. 결국 임차로 삶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차금의 악순환이 누적되어 이미 1930년에는 소작농가 1호당 평균 차금액이 65원이나 되었다. 같은 해 전국의 걸인수는 5만8204명으로 집계되어 있으나 일본이나 간도지방으로 흘러간 수는 막대한 것이었다.
    1928년을 기준으로 부산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건너 간 우리 나라 사람은 매일 평균 885명이었고, 1938년에 일본에 거주했던 우리 나라 사람은 100만3594명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이들 중 29.2%는 무직이었다.
    간도지방에 대한 이민은 1910년에 이미 5만 정도였으나 매년 1만에서 1만8000명선으로 이민이 계속되다가, 1918년에 와서 3만6627명으로 일시적으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는 시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일제의 수탈체제라는 거대한 폭력적 중압 밑에서 가장 약한 우리 사회의 하층구조가 짓눌려서 와해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광복 후 한국사회의 변화
  1. 1. 6·25 이전까지의 사회변화
    사회 변화면에서 보면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전체가 일제의 군사통치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사회적 조건이 모든 사회 변화의 기점이 된다.
    여기에서 일제의 군사통치라는 말은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일본 정부를 대표했던 조선총독부의 시정 자체가 이른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총동원체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식민지 총동원체제였다.
    그러나 미소 양군이 한반도의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을 분할 점령하기 전에는 사실상 한반도와 그 속의 주민들은 정치·문화·경제·사회적으로 하나의 민족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먼저, 1942년에 와서 전시 총동원체제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전제 아래에서 1945년까지 사회적 차원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가정하여, 1942년의 인구 상황은 광복 당시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1942년 통계를 가지고 말하면 한반도 전체의 인구는 2636만1401명이었다. 이 중 일본인이 75만2823명이고 외국인 거주자가 8만3169명이었으니까 우리 나라 사람으로만 치면 2552만5409명이 된다.
    반면에 1944년 총독부의 마지막 인구조사에 따르면 남한 거주민은 1588만 명이며, 광복 당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인 군인수는 34만7368명이었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과 일본인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지배와 복종이라는 민족적 갈등 속에 있으면서 거기서 경제적 사회관계가 파생되었다는 특수 사정이 바로 전체적으로 직업구조를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광복 당시의 민족별·산업별 인구 구성을 다음과 같이 형성하게 하였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 나라 사람 약 3분의 2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② 반면에 일본인의 농업 종사는 일본인 사이에서도 10분의 1 이하로 떨어지고 있으며, 그나마도 주로 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③ 우리 나라 사람의 2차산업 진출은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④ 일본인 사이에서 2차산업에 종사하는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2차산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의 비교는 4배에 이르고 있다.
    ⑤ 한국인의 3차산업 종사자는 한국인 사이에서 약 5분의 1이며, 이것은 말단관리·교사·회사원 및 상인 등 그 직종이 다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인의 3차산업 종사자는 거의 3분의 2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총독부관리·지방관리·경찰관 및 상인들로 추정된다. 식민지 지배의 실질적 기능 담당자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광복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이와 같은 민족별·산업별 인구구조가 동요·해체되면서 진공 속에 빠진 일본인 인구별 산업구조를 한국인 산업구조로 어떻게 흡수하게 되는가 하는 과제를 안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제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한 현실적 인식 없이는 풀어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 조건을 개관해 볼 필요가 있다. 개관의 범위는 남한을 중심으로 한 한정적인 것이다.
    ① 식량 사정:광복 당시 식생활은 전시 식량배급제도에 따라서 최저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 약 100만 명이 식량 배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일시에 식량 배급기능이 마비되었다.
    엄중한 통제 아래 있던 식량과 물자들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와 광복은 일시적으로 물질적 풍요감을 동시에 가져왔다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로 매매가 성하였다. 곳에 따라서는 식량 창고가 습격을 받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1945년에는 1205만 석으로 비교적 풍년이었고, 잡곡도 많이 남아 있었다. 만주에서 300만 석의 잡곡이 들어와 있었고,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간의 해상수송이 중단되어 많은 양의 쌀이 우리 나라에 남아 있었다.
    1945년 11월 12일 이승만이 신문기자회견에서 현재 쌀 1600만 석과 잡곡 1000만 석이 있다고 발표했는데, 그 발표가 약간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의 사정으로는 450만 석의 잉여 식량이 있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1945년 10월 5일 미군정청 일반고시 제1호에서 미곡의 자유시장정책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식량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미군정청은 1946년 5월부터 1년 6개월간 약 55만 톤의 식량을 미국에서 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봄부터 서울에서는 쌀을 달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은 식량수송체계의 미비, 미군정청 식량정책의 결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좌익세력의 정치적 선동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합해져서 일어난 일이었다.
    ② 광공업 사정:1938년의 통계에 의하면 기업 총수는 5,414개였고, 이 가운데 우리 나라 사람이 소유한 기업이 2,278개(42.1%)를 보이고 있어 수적으로는 적지 않은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공칭 자본 17억1313만 원 가운데 우리 나라 사람의 자본이 2억1382만 원으로 12.5%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우리 나라 사람의 기업 규모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기술인력 부분에서도 전체 8,476명 중 우리 나라 기술자는 1,632명(19%)에 불과했고, 금속공업 분야에서도 전체 1,214명 중 133명(11%)밖에 없었다. 거기에다가 거의 모든 종류의 차량과 기계류를 일본에서부터 사들여 왔으며, 광산도 90% 이상이 일본인 소유였다. 그래서 광복과 더불어 농수산 부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산업 분야가 일시에 기능마비상태에 빠졌다.
    1944년 6월 남한지역의 경우 공장 9,323개, 노동자 30만520명이었던 것이 1946년 11월에는 공장 5,249개, 노동자 12만2159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대량 실직자의 발생을 의미했고, 더욱이 군수산업과 군관계 사업체의 기능 정지는 이것보다 더 많은 실직자를 냈다.
    여기에 더해서 실직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1946년 8월 말까지 일본에서 약 150만 명, 중국 및 기타 지방에서 15만 명, 그리고 38선 이북에서 60여만 명이 이주해 옴으로써 실직현상은 일반화되었다.
    ③ 물가상승:광복 후 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물가상승현상이었는데, 이것이 큰 변화의 와중에서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은 일본인들의 무분별한 화폐 발행에 있었다.
    1945년 7월 현재 조선은행권의 발행은 약 47억 원이었으나 그 해 9월 말까지 86억8000만 원으로 급증하고 있다. 그것은 광복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 1945년 8월까지의 민간 보유 통화량은 통화의 약 50%였던 것이 1946년 3월 85%로 상승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미군 진주 전에 91억 원의 통화발행계획도 있었고 일본에서 비행기로 한국은행권을 유입해 온 것도 있었다.
    어떻든 이와 같은 요인들은 산업 마비와 증폭작용을 해서 광복 뒤의 물가상승을 부채질하며 물가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1945년 8월의 도매물가지수를 100으로 볼 때 1946년 6월의 도매물가지수는 주곡 485.6, 식료품 496.7, 직물 689.9, 연료 298.5, 비료 1,965.0, 공업원료 359.1이었다.
    여기에다 38선으로 인한 국토 분단은 국민경제를 일시에 양단하여 유기적 연관성을 차단함으로써 심각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구체적으로는 에너지 분야에서 먼저 일어났다.
    광복 당시 한반도 발전량의 98%는 북한지역에서 생산되었다. 당시 남한지역에서 생산되던 전력은 7만9500㎾에 불과했는데, 이것으로는 남한 수요의 5분의 1밖에 충당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남한은 전력에너지면에서만 보더라도 산업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하면 북한은 전체적으로 보아 석탄생산량의 92%, 광물 매장량의 71%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금속제품 90%, 비료 및 화학공업제품의 83%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생활 공산물의 부족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주곡정책의 부재와 더불어 물가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생활필수품 부족현상은 1946년의 공업 생산이 광복 전에 비해 6%, 식량 생산이 83%였다는 데서 그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1. 1.1. 정치정세
      정치정세는 경제질서가 미군정정책의 자유경제원칙하에서 사실상 혼란 속에 빠져들어간 것과 상승작용을 하였다.
      미소 양국이 다 같이 ‘해방자’의 자격으로 한반도에 진주했다는 사실은 광복 당시까지 통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했던 반일독립투쟁 민족 세력의 분열구조가 국제정세에 따라 새로이 공개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각 정치 세력간의 분열은 미소 양국의 이데올로기를 행동지침의 준거틀로 채택하는 특징을 보이면서 현재화(顯在化)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정치적 쟁점이 계급투쟁적 성격으로 변해 갔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좌우 대립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각 정당 사이에서 38선에 의한 국토 분단이라는 민족적 문제를 당 정강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정쟁의 명분으로만 삼는 경향이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남한 정당들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미소의 국가 이익에 추종하면서 대립상을 드러낸 것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미·영·소 삼국외상회의가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결정한 데서 출발한다.
      이 사실을 두고 처음 서울에서는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들이 이 안을 반대하면서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를 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은 돌연 찬성 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이로써 좌우 갈등은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찬반 태도와 관계없이 미소 양국은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단체등록 자격 문제로 미소간의 의견 대립과 좌우정치 세력간의 갈등으로 타협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제2차 회의가 열렸지만 여전히 의견 접근을 보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UN총회에 상정, UN에 넘기고 말았다.
      1947년 11월 14일 UN은 남북한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고 90일 이내 미군과 소군의 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결의 제2호를 채택하였으며, 동시에 이 결의를 실시 감시하기 위해 9개국으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국내에서는 이른바 이승만과 김구(金九) 사이의 노선 문제로 정계가 우왕좌왕하여 결국 단독정부수립노선과 남북협상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결국, UN결의에 의한 총선거가 UN임시한국위원단의 38선 이북 방문이 거절된 채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실시되었다.
      총선 결과 200명의 국회의원 정원 중 폭동사태로 2명을 뽑지 못한 제주도를 제외하고 남한 전역 내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이로써 대한민국의 기초가 확보되었고, 7월 24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 1.2. 좌익계 활동상황
      우리 나라에 공산주의운동 조직체가 비공개적으로 발생한 것은 1925년의 일이었다. 그 뒤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공산당활동은 대중조직으로 발전할 기회가 차단된 상태로 1945년까지 지하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있었다. 광복은 일시에 모든 종파와 그룹의 공산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급속하게 청년·지식인·노동자·농민층 속에서 조직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미 1945년 9월 26일 공산당의 통제 아래 조선노조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준비되어 11월 5일과 6일에 그 결성이 있었고, 11월 15일에는 전국청년단체총동맹(약칭 전청), 12월 8일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약칭 전농)이 생겼다.
      이로써 1945년 연말까지 도·군 차원에서 전평과 전농이 결성된 셈이지만, 특히 전농 산하 농민조합은 21개 시, 218군에 조직되었다. 동시에 전청 산하의 각종 단체도 44개나 되었다. 이 각종 단체들은 전국 13도, 22시, 218군에 걸쳐 2,397개 세포단체를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직 세력들은 미군정에 대해서 대체로 순응하는 우익세력과의 끝없는 갈등과 투쟁관계에 있었으며, 미군정청은 좌익세력들의 폭동화 경향에 따라 단속을 강화해 가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8월 15일 광복 일주년을 맞는 것을 계기로 하여 좌익계는 대중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좌익계는 미군정하의 경찰과 충돌했으며, 이를 계기로 총파업과 인민항쟁을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10월 1일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나 대구 주변 6개 지방에까지 확산되었고, 11월에 들어서는 경상남도·충청도·전라도·경기도 지방에까지도 뻗어 나가 다음해 1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우익과 미군정 당국이 단호한 태도로 좌익운동에 대치하는 전기가 되었다.
      대구폭동사건이 진압되고 얼마 가지 않아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도 폭동사건이 발생했고, 이 폭동으로도 남로당의 조직적 저항이 쉽게 꺾이지 않자 군대를 동원 이동하는 과정에서 10월 19일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이 발생했다.
      대구폭동사건도 많은 인명 피해를 냈지만 여순사건은 8만의 인명 피해와 1만5228호의 가옥 소실이라는 국지전쟁의 양상을 보였다. 반 년 동안 계속된 국군과 반란군 사이의 전투중 국군의 사망자만도 4,749명에 이르렀다.
      여순사건은 군대 반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남로당 중앙위가 끝까지 지휘를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 좌익 반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반란군의 조직적 저항력이 괴멸되자 이들은 지리산으로 도피해서 1952년까지 그 주변의 산간농촌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여순사건은 장기간 계속되었던 ‘무장투쟁’이라고 하지만, 이 사건으로 해당 지역의 주민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 영향은 우리 나라 사회 전체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공포심을 안겨 준 경험적 사실로 정착되었다.
      호남지방의 정세만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10월 이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일대의 산간지대에서는 남로당 지휘 아래 무장투쟁이 전개되어 게릴라들의 활동지역이 되었다. 강원도 오대산지구에는 같은 해 11월 평양 근교 강동정치학원에서 게릴라로 훈련을 받은 남로당계 인력 180명이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는 도시게릴라조직인 ‘K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남로당계 좌익활동은 군사조직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지만 1949년 9월부터는 새로운 공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공산당이 뿌린 전단에서 표명되었듯이 활동 목적은 북한 인민군이 침공해 들어왔을 때 치안 및 행정을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남로당의 게릴라활동은 처음에는 ‘남조선 자체혁명’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활동이 좌절되자 공산주의자들은 직접 남침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게릴라활동의 좌절은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남로당계 게릴라활동에서 볼 수 있다. 즉, 이 학원 출신자의 남파수는 모두 660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1950년 3월까지 이들 중 600명이 사살되었거나 귀순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 사실이 과장된 것이라고 해도 게릴라의 주력이 상실된 것은 확실하다.
      북한측의 선전물을 예로 든다면, 38선 이남에서의 게릴라활동은 1949년 10월 한 달 동안 유격대 동원 연 인원수는 8만9900명, 교전 횟수는 1,330회로 되어 있다. 그런데 1950년 3월의 전과 발표에서는 연 동원인원수 6만2793명, 동원 횟수 1,962회, 교전 횟수 1,038회였고, 동시에 한국 군경 사살 570명, 반동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주민 학살 459명, 농민대회 300여 회, 선전선동집회 1,274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게릴라활동이 중심이 된 것이고, 호남·영남·충청도까지 포함한 전국적인 규모에서는 1949년 4월부터 11월 사이에 연 동원인원수는 37만6401명이고, 교전 횟수는 6,768회, 사살 1만103명으로 되어 있어, 게릴라활동은 소규모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릴라활동에 의해서 주민들의 생활조건이 얼마나 파괴되었는가 하는 단면은 게릴라활동 기간중 전라남도 6개 군과 경상남도 4개 군의 산간벽지 주민들을 이주시킨 총숫자가 9만92명이며 해당 호수는 1만7488호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950년 6월 6·25전쟁까지의 남한 사회는 정치에서의 혼란, 경제에서의 궁핍에다 게릴라활동이라는 요인까지 합쳐서 극단적인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1. 2. 6·25전쟁 이후의 사회변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계속되었던 전쟁은 한국 사회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조건들을 가지고 왔다. 인적 피해면에서 학살을 포함한 사망자가 민간인 37만4000명과 군인 2만9000여 명으로 모두 40만3000여 명에 이르고, 납치·실종·포로 등으로 인한 유출 인구가 남한에서만 민간인 약 38만8000명에 군인 17만1000여 명으로 모두 55만9000여 명에 이른다. 이에 더하여 전쟁 미망인 20만 명, 전쟁 고아 10만 명, 전체 피난민 수 약 240만 명에 달하였다.
    6·25전쟁은 특히 남성들에게 커다란 인적 피해를 남겼다. 1952년의 전체 남성 인구는 1949년보다 10만 명 이상 감소되었으며, 20∼24세 남성 인구는 15∼19세 남성 인구의 26%밖에 되지 않았다. 물적 피해면에서는 공업시설 43%, 발전시설 41%, 탄광시설 50%, 주택 35%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는 인적·물적인 면에서 사회 존립조건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것이 된다.
    1. 2.1. 인구동태
      광복 직후 제1차 인구이동 파동이 전개되었지만 6·25전쟁은 또 한차례 전국적인 규모로 인구이동 파동을 초래하였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외지에서 귀국한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 총 220만 명이 유입됨으로써 연평균 10%의 인구증가율을 보였으며, 전쟁 동안에도 전선의 빈번한 이동으로 피난민들의 물결이 그칠 날이 없었다. 예컨대, 1951년 12월 현재 서울 인구는 104만 명의 감소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서울이 사실상 텅 빈 상태였음을 말해 준다.
      피난이동 과정에서 과거에 비해 통혼권이 확대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사회관계가 탈전통단계에 들어가는 조짐을 보였다. 특히,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쟁 동안의 남하 피난민으로 지역적 생활양식 차가 혼합되는 계기가 되어 문화혼합현상이 발생했으며, 이것은 전후 한국인의 새로운 생활양식을 구성하는 직접적인 소재가 된다.
      전후현상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현상은, 갑작스러운 인구증가현상이었다. 전후 계속해서 연평균 3%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는데, 이 결과 1960년대 초반부터는 학생인구의 급속한 증가현상을 자아내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학교제도 확대 또한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의 인구동태는 그 동인이 주로 정치적 상황·생활조건·전쟁 등에서 주어졌지만, 1960년대 이후의 인구동태는 공업화의 추세에 따라 그 구조가 변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을 출발 신호로 한 한국의 공업화는 사실상 한국형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공업화의 진행은 곳곳에 공업단지를 만들어 냈고, 고속도로를 출현시켰으며, 원자력발전소들을 세웠다. 이 추세에 따라 이농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시도 많이 생겨났다.
      6·25전쟁 기간중에 극도로 저하된 출생률과 높은 사망률로 말미암아 전후 한국 사회는 상당한 출생률의 증가를 보였다. 이 기간 동안의 출생률은 평상시보다도 10%를 웃돌아 전쟁 기간에 비해 20%의 증가를 보였다. 이는 이후 1970년대까지 파급적으로 영향을 미쳐 취학적령기 아동의 증가, 취업대상 젊은층의 증가, 가임 여성의 증가 등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기간을 제외하고 전후 한국 사회는 대체적으로 도시 인구집중현상과 더불어 출산율 및 사망률의 감소를 보여준다. 선진국과 같은 대체 수준 이하의 저출산율이 지속되면서 가족의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낮은 사망률은 노령층 인구의 증가로 나타났는데, 1960년 인구의 평균 연령이 23.1세에서 1995년 31.2세로 나타났다. 근대화에 따른 노령층의 취업 기회 감소와 함께 노령 인구의 증가는 노인 문제를 사회정책의 중요 분야로 부상시켰다.
      이와 더불어 노년기 여성 인구의 과잉현상과 남녀간 출생 성비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여성 인구 또한 증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가족생활 형태의 변화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발생시켰다.
      새로운 생활양식은 새로운 가치관과 규범을 요구하며, 이는 결국 전통문화와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특히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여성과 가정의 역할에 대한 관념의 변화는 사람들의 일과 직업의 가치에 대한 변화까지도 초래하였다.
      사람들이 경제적·물질적 이익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탈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시되는 선진국형 가치로 이동하고 있으며, 직업 선택에서도 삶의 여가와 적성이 보수나 급여보다도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후기 산업사회적 변화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통합과 전통가치의 보존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새로운 행동양식과 가치 정향의 변화로 인한 사회적 일탈현상도 발생하였다.
      6·25전쟁 이후 세대들이 점차적으로 사회의 다수를 형성해 감에 따라 이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한국의 정치·사회적 발전과 변동양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6월 30일부터 KBS-TV가 시청각기능을 통한 이산가족찾기운동을 벌였을 때 보여준 온 국민의 감동과 2000년 6월 15일부터 열렸던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분출된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6·25전쟁 이후의 급격한 인구 변동 속에서 한국민족이 공유하는 문화적·정서적 가치와 정치·사회적 이념이 상당히 동질적이며 과거와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인구 변동에서 주목할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출산 감소현상이다. 이러한 출산 감소는 대체로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출산율이 대체 수준을 기록한 1085년경 이후부터의 지속적인 출산 감소로 인하여 1990년에는 합계출산율이 대체 수준인 2.1보다 낮은 1.6명으로 선진국 수준(100년 평균 1.9명)보다 낮게 나타났으며, 인구증가율 자체는 1%를 약간 하회하는 정도에 머물면서 매년 약 40만 명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전체 인구의 성비 변화를 살펴보면, 1960년의 성비 100.7, 1970년에는 102.4로 남자 인구가 여자 인구에 비해 증가했으나, 1990년에는 101.3으로 다소 저하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5세 미만 인구의 연령별 성비를 살펴보면, 1985년 109.5에서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임으로써 0∼4세 인구의 성비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점차 가정마다 소자녀화가 진행되면서 성 선별에 의한 선택적 출산이 증가한 때문이다.
      한편, 생산연령 인구를 살펴보면, 15∼64세의 생산연령 인구는 1960년 1369만8000명으로 54.8%를 점하였으나, 이후 계속적으로 증가하여 1990년에는 2964만8000명으로 69.2%에 이르렀으며, 이 추세는 지속되어 2000년에는 약 3370만5000명(72%)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점하게 되었다. 또한 65세 이상의 노년 인구는 인구 규모나 구성비 모두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1960년에는 노인 인구가 72만6000명으로 총인구의 2.9%에 불과했으나 1990년에는 214만4000명으로 5.0%로 증가했으며, 2021년에는 662만5000명으로 13.1%를 점하게 될 전망이다.
      사망률의 감소는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근대 초기인 1910∼1915년에는 보통 사망률이 인구 1,000명당 33.7명이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보통 사망률이 인구 1,000명당 10명 이하로 낮아지면서 가장 높은 인구증가율을 기록했다. 이후부터 점차로 감소하여 1985년 6.2명에 도달한 후 현재는 6.0명 전후에서 거의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반면에 출생률은 계속 낮아져서 인구증가폭은 출생률의 감소 정도만큼씩 낮아졌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근세에 들어와서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20세기 초 남·녀 각각 23년과 24년이던 것이 해방 이후에 대폭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55∼1960년에는 평균 수명이 남녀 각각 51년과 54년으로 높아졌다가 선진국 수준(1990년에 남녀 각각 70.4년과 77.7년)에 접근하는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증가 속도가 다소 둔화되었다. 1990년에는 남자가 70년, 여자가 75년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녀 평균 수명이 70세를 상회하고, 출산 수준이 대체 수준을 훨씬 하회함에 따라 장래에 우리 나라 총인구의 감소가 예상되며, 신규 노동력 공급의 감소, 노동 인구의 증가 등과 같은 새로운 인구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1. 2.2. 언론의 변화
      일반적으로 언론의 변화가 정치정세의 변화를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언론 변화는 이 당연함을 넘어 오히려 정치 변화 그 자체였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이후 1945년 8월 15일까지 무려 12개의 법률로써 언론을 통제해 왔는데, 광복 후 1945년 10월 29일 미군정은 법령 제19호로써 신문을 통제하려 하게 된다. 그것은 광복 후 약 2개월 동안 제각기 당파성 주장에 시종하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군소신문에 대해 통제를 가하려는 것이었다.
      1947년 9월 현재 주로 서울에 집중되고 있던 신문 수는 일개 영자신문을 포함해서 25개였으며, 그 중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11개 신문이 중립, 7개가 우익, 7개가 좌익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6월 4일 일간통신 1개, 일간신문 8개, 주간 6개, 순간 2개, 월간 41개, 월 2회간 1개 등 59개 사가 정리되었는데, 그 중 43개는 재정난으로 정리되고 나머지는 좌익 계열 언론이었기 때문에 정리대상이 되었다.
      6·25전쟁기간 동안 또는 전후 자유당시절의 신문은 정부의 효과적인 통제 아래 있었으나,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때때로 선거와 관련되어 언론이 탄압받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정적인 언론 통제는 1958년 12월 「보안법」 개정안이 야당의원 강제 축출 뒤에 통과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4·19혁명 이후 또다시 언론홍수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961년 3월 31일 현재 4·19혁명 전에 41개였던 일간신문이 112개로 늘었고, 통신사는 14개였던 것이 274개, 주간신문은 136개에서 476개, 월간지는 400개에서 470개, 기타 118개에서 177개로 증가하여 총 1,509개로 4·19혁명 전 709개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언론이 국가 이익과 국가 목표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하였다.
      이러한 언론관에 따라 정부는 1970년 5월 14일 이후부터 1973년 12월 16일까지 17차에 걸쳐 대통령령, 시행령 또는 법률 개정을 통하여 언론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언론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한 계기는 「대통령긴급조치령」이었으며,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에서부터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제9호까지의 9개 긴급조치가 해제될 때까지 언론은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과 방송은 기업형태로서는 급속한 비대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 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정보산업의 발전이라는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이후 약 15년간 신문 발행부수의 증가율은 약 2.2배,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대수는 약 13배 증가라는 신장세를 보였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현상은 35개의 민간방송 중 16개 민방이 1970년대 초에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점차로 신문·방송 복합기업의 성격으로 발전하여 상업주의적 성격이 농후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 말까지 신문·방송 복합기업의 수는 11개로 헤아려졌으나 이 중 8개 복합기업체가 재벌계 복합기업이고 친정부계는 3개이다.
      1980년대에 들어 한국 언론은 신군부 세력에 의한 언론 강제 통폐합으로 인하여 중요한 고비를 맞게 된다. 이로 인해 언론인 488명이 강제 해직되고, 전국적으로 주간 15종, 월간 104종, 격월간 13종, 계간 16종, 연간 24종 등 모두 172종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되었다.
      서울에서 4개 신문사가 통폐합되고 지방에서는 각 도에 1개의 신문사만이 허용되었으며, 상업방송의 공영체제 전환, 지방 주재 기자 철수, 대형 단일통신사 설립(동양통신사, 합동통신사, 시사통신사, 경제통신사, 실업통신사가 연합통신사로 통합) 등의 대규모 언론구조 개편과 보도지침 등을 통하여 언론에 대한 정부의 타율적 통제가 노골화되고 극심해졌다.
      그러나 문민정부 수립 이후 언론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는 점차 사라지고 언론사간의 자율적인 경쟁을 통한 발전을 도모했으나 언론의 상업성, 정치적 선정주의, 언론윤리, 재벌의 언론사 소유구조, 언론의 권력과의 유착구조 등에 대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2000년 3월에 통합방송법이 제정 실효되고, 이에 따라 방송정책·행정권이 정부로부터 독립된 방송위원회에 넘겨져 방송독립의 제도적 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공영성 확보의 제도적 기틀과 위성방송과 케이블TV 등 기술혁신에 따른 언론의 변화에 대한 법적 보완이 이루어 졌다.
    1. 2.3. 공업화와 노동운동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공업화로 인한 농촌 인구 감소현상은 총인구에 대한 농촌 인구의 10년마다의 이동 추세에서 나타나고 있다. 1960년에 64.2%를 차지했던 농촌 인구는 1970년에는 50%로 감소하였고, 1980년에는 33.6%로 더욱 감소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농촌 인구 감소현상은 대표적으로 서울 인구의 집중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수도 서울은 1982년 전체 인구의 22.3%를 차지하면서 대학 수의 37.1%, 대학원 수의 53.3%가 서울에 위치하게 되었다. 경제나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문화도 서울에 집중되었으며, 도시 하층을 구성하고 있는 근로자의 소득도 농가 소득을 앞지르고 있다.
      1975년을 기준으로 농가의 실질소득은 근로자의 그것에 비해 1980년 초까지는 계속 뒤로 처지고 있었던 데서도 이농현상의 배경을 알 수 있다. 1965년의 농가 소득은 근로자가구 소득에 비해 0.96이었던 것이 1980년까지는 0.61까지 떨어지다가 1983년에는 0.67로 회복되었다.
      이러한 근로자가구의 소득 증가는 1963년의 피고용자 수 약 241만 명에서 1980년 말까지 1119만 명으로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1970년부터 1981년까지의 연평균 실질임금상승률 7.7%가 그것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근로자계층의 급격한 비대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과거에 정부정책의 영향으로 왜곡을 면하지 못한 데 대한 반향으로도 표출되었다. 그 한 단면이 유신시대가 끝난 1980년 한 해에 집단 노사분규가 407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그 전 해의 105건에 비하면 폭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일시적으로 진정 기미를 보였던 노사분규는 1984년 이후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고, 규모도 대형화 추세를 보였다. 그 해 4월과 5월의 택시기사의 대규모 집단 시위와 1985년의 대우자동차공장에서의 대규모 농성파업으로 노사분쟁이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경향의 시발점이 되었다.
      1987년 7∼8월의 ‘노동자대투쟁’은 6·25전쟁 이후 노동운동의 분기점으로 그 두 달간에 무려 3,000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하였고, 1987년 6월에 2,752개였던 단위노조가 1989년에는 7,883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양적 증가 외에 기존의 한국노총 중심에서 벗어나 조직적인 조합간의 연대파업을 통한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노동운동 형성이라는 질적인 성장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5년 업종별 노조와 대기업 노조들을 포괄하는 민주노총이 결성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보다 온건한 한국노총과 진보적인 민주노총의 갈등과 경쟁으로 특징된다.
      외환 위기로 1997년 말 IMF의 관리체제를 맞으면서 한국의 노사관계는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에 의해 노사정위원회를 탄생시켰다. 노동자, 사용자, 정부 대표 외에 공익위원이 참여하는 노사정위원회는 대통령자문기구에서 출발하여 법제화되었으며, 한국 노동시장의 발전과 변동은 이러한 사회적 협의기구가 앞으로 어떻게 소기의 기능을 수행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으로 전망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북한사회의 변화와 한국사회의 변화 양상
  1. 1. 북한사회의 변화 양상
    광복 후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되고 정치적으로 죄우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에도 북한에서는 소련군정 당국이 조선공산당의 일당 독재 지배체제를 일방적으로 후원, 지령함으로써 북한 사회는 전면적이고 심층적인 사회관계 재편성의 길을 다졌다.
    당시 서울에서는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재건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견지해 온 ‘일국일당원칙’에서 보면 소련군 지배 아래 있는 평양의 조선공산당이 오히려 중앙당이 될 수밖에 없는 정세였다. 적어도 38선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공산당의 중앙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서 먼저 세워진 셈이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3일 사이의 공산당 책임자 및 열성자 회의에서 ‘북조선 분국’설치를 결정했고, 박헌영은 10월 23일 이 결정에 승복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평양의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이 중앙당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1946년 4월에 ‘분국’을 정식으로 북조선조선공산당으로 바꾸었다. 그 뒤 이것이 ‘조선노동당’으로 개칭되었는데, 조선노동당의 창당일을 공식적으로 1945년 10월 10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국의 설치는 곧 노동당의 탄생이었다.
    그 뒤 노동당은 정치적으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사이에 많은 문제를 제기했고, 또 내부적으로는 남로당과의 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정치적 갈등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회 변혁의 직접적인 추진력을 발동시키게 된다. 곧 ‘민주개혁’정책의 실시를 그 시발로 하여 각종 조처가 뒤따르게 된다. 민주개혁의 내용은 사실상 토지개혁이었고, 토지개혁은 또한 소비에트화의 첫 단계였다.
    토지개혁은 1948년 3월 5일 「토지개혁령」 발표 후 한 달 만에 완료되었는데, 그 방법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형식이었다. 개혁 전에는 총농가 중 6.8%가 지주, 30%가 자작 겸 소작, 13.2%가 순자작농, 그리고 50%가 순소작농이었던 북한 농촌사회관계를 일시에 바꾸어 놓을 정도로 과격하였다. 100여만 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몰수되었고, 그 중 약 98%가 72만5000명의 빈농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농촌사회관계 개편에 이어 도시지역의 사회관계도 개편되었다.
    1946년 8월 15일 「중요산업 국유화법령」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관계가 국가 소유로 바뀌었다. 그러나 사회관계 변화면에서 중요한 측면은 토지개혁 직전까지 이미 북한 전 지역에서 1만2100개의 농촌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것이 토지개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공업 생산수단 소유관계의 전환에서도 같은 방법에 동원되었다. 모든 민주개혁의 방법이 형식보다도 군중노선주의의 압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개혁은 일시에 사회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가 전면적으로 재편된 기초 위에서 11월 3일 이른바 ‘흑백함’ 투표를 근거로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가 구성되고 정권형태가 성립되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는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10장 104조에는 이 헌법의 효과가 ‘전 조선지역’에 미친다고 되어 있고, 또 정부의 정강에도 남한지역까지 북한과 같은 개혁을 실시한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비록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겨나면서 사실상 38선으로 분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정부의 행정지역은 헌법적으로 무정형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대한민국헌법의 경우 한반도와 그 주변 도서를 영토로 규정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북한 사회의 그 뒤 변화에 원천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이유는 통일 문제를 명분으로 전체 사회에 대한 동원과 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원과 통제의 첫번째 계기는 6·25전쟁이었다. 전체적 동원 아래 수행된 전쟁 수행 과정에서 가족생활까지 해체할 지경에 이른 사회생활은 일시에 군대지원기능으로 전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N군이 철수하고 휴전선이 정착되었을 때 북한 사회에서는 두 번째 파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동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동안 와해되고 있던 사회 통합의 문제였다. UN군 진주시 협력분자를 색출해서 일반 주민과 분리시키고, 그것으로 일반 주민의 동요를 막는 일이다. 이른바 192호 결정이라는 것이 법적 근거였다.
    일반 비당원 문제는 이렇다고 해도 당원의 문제도 남아 있었다. UN군 점령 당시의 행동이 당원답지 않았던 사람들을 분리하는 작업이 그것이었는데, 당시 60만 당원 중 45만 명이 심사대상이었다고 하니 북한 내부의 동요상을 짐작하게 한다. 동시에 남로당계의 숙청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농촌의 통제 문제였다. 전쟁중 37만 정보의 경작지가 감소되었고, 28만 두의 소, 38만 마리의 돼지, 9만 본의 과수가 피해를 받았으며, 농민의 40%가 극빈, 50%가 겨우 살 만한 처지, 10%가 여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정권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전 농민이 1, 2, 3단계를 거쳐 1958년까지 협동조합형태로 재편성되었다.
    농촌지대는 이와 같이 사회주의 소유형태로 되었지만 도시지대의 상공업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전후 사정으로 먼저 상공업 종사자를 이용할 필요가 있어 상공업을 신고제로 했던 바로 그 당시 인구 50만 명을 헤아리던 평양에서만 1만5000의 신고가 있었다. 이는 상공업계에 대한 그 동안의 통제력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8년에 이르러서는 농업과 공업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한 북한 정권이 철저한 당성 기준으로 북한 전 주민을 핵심계급, 일반계급, 그리고 불신계급(복잡한 계급)으로 분류하여 다원적 통제를 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이 당성 분류작업은 이른바 ‘중앙당 집중지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는데, 그 실시 핵심 분자는 약 7,000명이었다. 이들에 의한 삼단계 분류방법을 통해서 ‘불순분자’를 분류해 냈으며, 그 결과 평양에서만 5,000세대의 불순분자, 약 3,000명의 반사회적 범죄자들이 강제 이주되었다는 사실로써 이러한 조처가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분 분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약 200만 명에 이르는 월남자 가족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그 밖에도 귀환포로와 그 가족 약 40만 명, 군대 기피자·종교인 및 그 가족 약 20만 명, 남한 출신 및 그 가족 약 40만 명 등 모두 약 300만 명이라는 숫자가 처리대상이 되었는데, 이 숫자는 당시 북한 총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이들의 문제는 북한 사회의 정치적 통합에 역기능하는 요소들이었으며, 지금도 북한 사회의 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북한 사회가 안정된 사회라고 할 수 없는 근거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북한 사회의 변화를 사실적 차원에서 개관하는 일은 일차 자료 부족으로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일당 독재하에서 그러한 것처럼 정치·경제·사회 생활 모두가 당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는 기본 사실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에 의해서 변하는 부분 사이에는 그 심도와 변화 시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사회 변화는 전래해 오던 기본적 사회구성의 요인들을 ‘혁명적’으로 지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그 변화의 영향은 총체적인 것이었으니, 가족제도·성별 역할분담체계·도덕률·지배관계가 거의 동시적으로 와해되었다. 이 바탕 위에서 당정책에 따른 새로운 사회 형성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형성 때문에 북한 사회는 당원 지배사회가 되었고, 또한 조직 통제면에서는 병영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이러한 병영사회 형성에서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는 불가피하게 의식(사상)의 통제가 강행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사상 통제의 핵심적 준거는 ‘주체사상’이며, 이 사상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농민은 물론 35%가 당원인 공장노동자들이다.
  1. 2. 한국사회의 변화 양상
    한국 사회가 실질적으로 구조 변화를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로 인해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 공업화의 성격이 수출지향형 공업화였기 때문에 공업과 농업 사이에 커다란 불균형현상을 초래하여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낳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1960년대 이후에 국민경제의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 또한 사실이다.
    1960년대 이후를 경제성장시대라고 할 만큼 전국적 규모로 기업체가 발생하여 사회 생산이 늘고 개인의 소비도 늘었다. 이 사실은 1960년대 이후 사회 변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고, 이 요인으로 한국의 도시와 농촌의 모습도 달라졌다. 이러한 가시적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유발시키는 이유와 동기의 차원도 변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생활구조와 생활의식의 변화를 우리가 근대화라고 한다면 한국의 근대화가 사실적으로 실현된 과정은 1960년대 이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공업화의 초기 단계는 정부 주도의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효율성은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결여한 것이었다. 경제에 대한 정치적 권위주의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시대를 겪고 제5공화국시대를 지나면서 한국 경제는 국가 통제의 범위에서 벗어나 서서히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 물론, 모든 산업 분야가 일률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산업세계에서 노사가 각기 연합적인 방법으로 국가 통제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개인 또는 법인재산형태의 국가 소유화 경향보다는 오히려 국가 재산의 사유화 또는 공사화 경향이 커졌다. 이러한 경향은 교육·문화·사회 및 공동사회 활동 영역에서 ‘정부 주도’라는 말이 긍정보다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일반 사회의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반 추세를 볼 때 한국 사회의 변화 방향은 통제보다는 사회생활 속에서 자유와 경쟁의 원칙을 더 많이 구조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사회연구의 어제와 오늘
  1. 1. 1945년 이전의 사회연구
    우리 나라에서 한국 사회 연구는 그 방법론적 기초가 약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주로 제도사적 연구에 한정되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던 영역이 있었다고 한다면, 특정 사관에 따라 사실의 취사 선택 과정을 통해서 특정 사관을 확증하려는 이른바 역사연구이다. 이를테면 유물사관적 경제·사회사의 성격을 짙게 띠는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나마도 일제강점이라는 조건 아래서는 대학 기능의 산물이 아니고 개인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먼저 사료를 제외하고 말하면 어느 정도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제도사 연구로는 안확(安廓)의 『조선문명사 朝鮮文明史』(일명 朝鮮政治史, 匯東書館, 1923)를 들 수 있다. 그나마 총독부의 가혹한 검열로 원래 1,000면 이상의 큰 책으로 계획되었던 것이 소책자로 발행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서구의 사회경제사 연구의 방법론이 일본에 알려지고, 그것을 가지고 조선사회경제사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 연구는 사회경제사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것도 전적으로 일본인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들조차도 총독부의 정책자료 아니면 총독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와다(和田一郎)의 『조선의 토지제도 지세제도조사보고 朝鮮の土地制度地稅制度調査報告』(1920)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의 체계적인 연구는 그 당시의 사정으로는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에서만 가능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출간된 제도사 연구의 중요 생산물은 무라야마(村山智順)의 『조선사회제도사 朝鮮社會制度史』, 오다(小田省吾)의 『조선교육제도사 朝鮮敎育制度史』, 아소(麻生武龜)의 『조선재정사 朝鮮財政史』·『조선지방재정사 朝鮮地方財政史』·『중앙 및 지방제도 연혁사 中央及地方制度沿革史』·『군제사 부 경찰제도사 軍制史附警察制度史』·『조선전제고 朝鮮田制考』, 하나무라(花村美樹)의 『조선법제사 朝鮮法制史』 등이 있다.
    이상의 연구보고 외에 각종 연구보고서가 있지만 대다수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자료용이었기 때문에 2차 자료적인 의미밖에 없다. 한국 사회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이러한 자료들은 일단 과학적 검증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비교적 학문적인 연구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회 논문집 중 제6책 『조선사회경제사연구 朝鮮社會經濟史硏究』를 비롯하여 제9책 『조선사회법제사연구 朝鮮社會法制史硏究』, 제10책 『조선경제의 연구 朝鮮經濟の硏究』 및 제12책 중 시카타(四方博)의 「조선시대의 인구동태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인 연구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는 정책적 의도를 배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사회정체론’이라든지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또한 이들 학자들의 저작물에는 시가타의 『조선사회경제사』처럼 일본의 한국 침략을 ‘자본주의화’와 동일시하는 논리도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일제 및 조선총독부의 배타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이다.
    총독체제가 확립되어 가면서 이러한 성격의 연구는 더욱 축적되어 갔다. 일제 통치 전 기간을 통해서 일본인의 한국 사회에 관한 통사적 연구에 관한 단행본은 경제 분야에서 20책, 사회·문화 분야에서 11책이 나왔다.
    이에 비해서 한국인은 경제 및 사회 분야에서 백남운(白南雲), 문정창(文定昌) 정도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체계적인 연구가 부진했던 것은 한국인에게 연구조건이 부여되지 않았던 탓이다.
    한편, 학문적·체계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제의 침략이 시작된 이후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 사회·경제에 관한 답사·연구보고서 및 정기간행물이 비상하게 증가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식민 통치를 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은 이들 출판물에 의해서 통계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1945년까지 이러한 출판물이 관·민할 것 없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종류는 경제 분야, 지방행정 단위의 정기간행물, 금융 및 민간단체의 정기간행물, 연구단체의 정기간행물 등으로 704건이나 된다. 이에 반해서 한국 사회에 대한 간행물은 157건이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관심이 주로 경제에 집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와 동시에 몇몇 학문적 연구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카타의 「조선시대의 인구동태연구」(경성제국대학 법문학회논집 제10책 및 제12책),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상 朝鮮社會經濟史』(東京, 1933) 및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東京, 1937), 그리고 최호진(崔虎鎭)의 『근대조선경제사 近代朝鮮經濟史』(東京, 1942)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이타니(猪谷善)의 『조선경제사 朝鮮經濟史』(東京, 1928)를 들 수도 있으나, 종합적인 방법이라기보다는 제도사적 연구에 끝난 감이 있다.
  1. 2. 광복 이후의 사회연구
    한국 사회에 대한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급속한 성장을 한다. 한국 사회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뒤늦게 만개하는 이유는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한국 사회를 관철하고 있던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적 영향력과 반공주의적 분단체제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60년대까지의 한국 사회에 대한 연구는 미국의 실증적 행태기능주의 이론이 한국에 적용된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약간은 무비판적으로 도입된 서구 이론이 한국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적합성 시비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행태기능주의적 연구 동향 외에 갈등론 등의 다양한 이론적 적용에 의한 연구가 시도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들은 여전히 미국 중심의 이론적 편향성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로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 연구에 대한 토착화 주장과 함께 민중사회학, 비판이론, 마르크스이론 등 다양한 이론적 틀을 통한 한국 사회에 대한 주체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는 한국 사회를 후기 산업화사회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이론적 시각이 대두되는데, 이에 따라 유교와 불교 등 한국 사회를 전통적으로 지배해 오던 종교문화적 가치와 유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연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산업, 경제 및 사회 발전 분야의 연구가 가장 많고, 가족이나 친족 및 여성 등 인적 관계와 성에 대한 연구가 다음을 차지하며, 농촌사회와 사회계층 등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러한 연구 동향은 6·25전쟁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근대화에 대한 경험과 사회적 관심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 산업·경제 및 사회 발전 분야와 더불어 여성 인구 및 노령화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으나, 농촌사회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1990년대에 들어 한국 사회 연구에서 중요하게 추가되는 분야는 시민사회의 역할에 관한 것으로, 광복 이후 국가 주도에 의한 타율적 성장을 극복하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중산계층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의 성장에 관한 연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 외에 민족통일 분야도 6·25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급속히 주목받는 연구 분야가 될 전망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정교)

  • 『속음청사(續陰晴史)』(김윤식)

  • 『한국통사(韓國痛史)』(박은식)

  • 『매천야록(梅泉野錄)』(황현)

  • 『이조후기(李朝後期)의 사회(社會)와 사상(思想)』(한우근,을유문화사,1961)

  • 『군국일본조선점령삼십년사(軍國日本朝鮮占領三十年史)』(문정창,백문당,1965)

  • 『해방삼십년사(解放三十年史)』(송남헌,성문각,1975)

  • 『한국현대문화사대계(韓國現代文化史大系)』(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1980)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81)

  • 『북한총람(北韓總覽)』(북한연구소,1981)

  • 『한국지(韓國誌)』(러시아재정성,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4)

  • 『한국사회사론(韓國社會史論)』(황성모,심설당,1984)

  • 『분단사회(分斷社會)의 비평적 인식(評價的 認識)』(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7)

  • 『현대한국정치사(現代韓國政治史)』(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7)

  • 『현대한국경제사(現代韓國經濟史)』(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7)

  • 『조선총독부시정년보(朝鮮總督府施政年報)』(국학자료원)

  • 朝鮮における近代資本主義の成立過程  (朝鮮社會經濟史硏究, 京城帝國大學 法文學會, 1933)

  • 蹇蹇錄  (陸奧宗光, 岩波文庫, 1933)

  • 最近の植民地政策·民族運動  (日本資本主義發達史講座, 岩波書店, 1933)

  • 「北朝鮮の社會·經濟構造についての試論」(汪城素,『コリア評論』 ,1970.3·4月號) 서지표기가 맞는지

  • 北朝鮮と南朝鮮  (林建彦, サイマル出版會, 1971)

  • 十九世紀後半期日帝統治末期の朝鮮社會經濟史  (全錫淡·崔潤奎, 龍溪書舍, 1978)

  • 植民地期朝鮮の社會と抵抗  (飯沼二郞·姜在彦, 京都大學 人文科學硏究所報告, 1981)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5년)
황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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