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또는 태수(台叟), 호는 규암(圭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송계사(宋繼祀)의 고손이며, 정랑 송순년(宋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송여해(宋汝諧)이고, 아버지는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송세량(宋世良)이다. 어머니는 유승양(柳承陽)의 딸이다.
진사(進士) 엄용공(嚴用恭)에게 배웠고, 김안국(金安國)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1년(중종 16)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 때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장악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인사 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전경(典經)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연에 참여했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송인수는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광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南平縣監) 유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白仁傑)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런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던 중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규암집(圭菴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