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葬事)에서 비를 많이 세우는 제도가 있었으며, 진한(秦漢) 이래 죽어서는 공업(功業)이 남았고 살아서는 덕정(德政)이 있는 자는 모두 돌로 비를 세웠다.
신도비의 제도는 중국에서 진송(晉宋, 5세기초) 때 비롯되어 천자 및 제후들이 모두 신도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그 각문(刻文)이 다만 ‘모제(某帝)’ 혹은 ‘모관신도지비(某官神道之碑)’라고 하였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지리가(地理家)의 말에 따르면 동남쪽을 신도라 하기 때문이다. 후한(後漢) 때에는 묘 앞에 길을 트고 석주(石柱)를 세워 표하였던 것을 신도라 칭하였으나, 진송 이후 비각(碑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도비는 조선시대 왕릉의 신도비로서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와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또, 사대부의 신도비는 웬만한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자들의 묘 앞에 7, 8척(尺)되는 큰 비가 서 있어 이수(螭首)·귀부(龜趺)의 위용을 보인다.
즉,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사대부의 신도비는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