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무열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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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신라 무열왕릉 정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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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능. 왕릉.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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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능. 왕릉. 사적.
내용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만 4,169㎡. 미발굴분이며 구조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로 추정된다.

서악동 구릉의 동사면에 종렬한 5기의 대형 원분(圓墳)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높이 약 13m, 주위 둘레 112m이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자연석으로 된 호석(護石)을 돌렸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분구 언저리에는 잘 다듬은 돌로 호석을 돌리고 여기에 동물머리에 사람몸을 한[獸首人身] 십이지(十二支)를 배치하거나 다시 석책(石柵)을 돌리고 있다. 이에 비하면 무열왕릉의 봉분장식은 소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의 전방 동북쪽에 능비(陵碑)가 있으나 현재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碑首)밖에 남아 있지 않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비신은 조선시대까지는 잔존했던 것 같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속(續)에는 비문의 글이 당대의 명필이며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것이라고 되어 있다.

비신의 귀부는 장방형의 대석 위에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생동감이 넘쳐 있어 신라 조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등의 전면에 거북등무늬[龜甲文]를 새기고 그 주위에는 비운문(飛雲文)을 돌렸다.

비신의 갓머리장식인 이수의 전면에는 6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는 전체(篆體)로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2행 8자가 양각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명문에 의해 무열왕릉이 신라의 역대 능묘 중 피장자(被葬者)가 명확한 유일한 능묘가 되었다. 귀부의 네 모퉁이에는 초석이 남아 있어 당초에는 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열왕릉의 귀부와 이수는 비록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 발현된 것이나, 조각의 정교함과 화려함에 있어서는 도리어 당대의 조각품을 능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朝鮮の建築と藝術』(關野貞, 岩波書店,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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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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