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시 ()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서북부 압록강 하구 남안에 위치한 시.
정의
평안북도 서북부 압록강 하구 남안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의주군, 남쪽과 남동쪽은 용천군, 북쪽과 서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의 안동(安東)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4°20′∼124°28′, 북위 40°00′∼40°08′에 위치하며, 면적 10.6㎢, 인구 약 12만7535명(1943년 현재)이다.

상반동1가(常盤洞一街)·상반동2가·상반동3가·상반동4가·상반동5가·상반동6가·상반동7가·상반동8가·상반동9가·빈(濱)·대화(大和)·본(本)·욱(旭)·앵(櫻)·영동1가(榮洞一街)·영동2가·영동3가·영동4가·영동5가·영동6가·영동7가·진사동1가(眞砂洞一街)·진사동2가·진사동3가·진사동4가·진사동5가·진사동6가·진사동7가·노송(老松)·운정(雲井)·매지(梅枝)·약죽(若竹)·초음(初音)·하(霞)·녹(綠)·압천(鴨川)·마전(麻田)·미륵(彌勒)·민포(敏浦)·동마전(東麻田)·서마전(西麻田)·남미륵(南彌勒)·남민(南敏)·향교(鄕校)·동재(東齋)·남재(南齋)·창(倉)·연저(煙渚)·용상(龍上)·용하(龍下)·용연(龍淵)·대석(大石)·중재(中齋)·서재(西齋)·서린(西麟)·선상(仙上)·선하(仙下)·송한(送鷳)·탑상(塔上)·탑중(塔中)·탑하(塔下)·석하(石下)·석중(石中)·석상(石上)·낙청(樂淸)·낙원(樂元)·유(柳)·창포(倉浦)·토교(土橋)·화평(化坪)·풍하(豐下)·연상(蓮上)·풍서(豐西)·와이(瓦耳)·백토(白土)·서당(書堂)·연대(烟臺)·토성(土城)·성외(城外)·정심(正心)·수문(水門)·동초(東草)·신평(新坪)·유초(柳草) 등 84개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상반동4가이다.

자연환경

시의 남쪽 경계에 삼교천(三橋川)이 서류하고 북쪽에는 압록강이 서남류하면서 하구에 복합삼각주를 형성해, 인근의 용천평야 및 해안간석지와 더불어 저평한 신의주평야를 이룬다.

압록강 상류 산간지방에서는 양안에 깊은 절벽을 파면서 감입곡류하는데, 반면에 하구의 신의주 일대는 토사(土砂)가 퇴적되어 하중도·범람원·삼각주 등이 매우 발달하였다.

따라서 시 일대는 압록강 하구의 넓은 사주(砂洲)로 홍수 때마다 물이 넘쳐 주거와 농경에 부적당한 범람원이었다. 그러나 도시를 건설하면서 4m 높이의 제방을 쌓아 홍수를 방지하고 다시 시가지를 확대하면서 큰 제방을 밖에 축조하였다. 지질은 결정편암계이다.

기후는 한반도 서북단에 있으나 바다에 가까우므로 내륙지방보다 다소 온난하며 대륙성 기후가 뚜렷해 연교차가 크다. 연평균기온 8.7℃, 1월 평균기온 -9.3℃, 8월 평균기온 24.2℃이며, 연강수량은 1,049㎜이다.

역사

[고 대]

근대 이전까지의 연혁은 의주군과 그 자취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전의 이곳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다만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의 영역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고 려]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이었으며 화주(和州)라고도 하였다. 거란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 했고, 1054년(문종 8)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또는 把州)라고 고쳤다.

1117년(예종 12) 여진이 요나라를 공격하자 요나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과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이 바다를 건너 피해 와서 영덕성(寧德城)에 문서를 보내 내원성(來遠城)과 포주를 고려에 귀속하였다.

군사가 성에 들어가 병기·돈·곡물을 수습하니 왕이 기뻐하며 의주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사람들을 이주시켰으며, 이 때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1221년(고종 8) 이곳에서 반역사건이 일어나 함신(咸新)으로 격하시켰다가 곧 복구시켰다. 1269년(원종 10) 원나라의 박색부(博索府)에 소속되었다가 1276년(충렬왕 2) 고려로 회복되었으며 지주사를 두었다. 1366년(공민왕 15) 의주목으로 승격시키고 방어사를 두었으며, 1369년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조 선]

1402년(태종 2) 판관을 두었으며, 1408년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을 내속시키고, 세조 때 이르러 진을 설치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이곳으로 피란했다가 환도 후 1593년 부윤으로 승격시켰다. 1634년(인조 12)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를 겸했다가 병자호란 후 혁파된 뒤 1641년 양서운향사(兩西運餉使)를 겸하였다.

[근 대]

1904년 2월 10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성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군용철도를 긴급히 부설할 필요가 생김에 따라 같은 해 3월 임시철도감부(臨時鐵道監府)를 설치하고, 한국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공병대를 투입해 경의선 부설에 착수하였다.

1905년 4월 28일 청천강·대령강의 철교를 제외한 용산∼의주간의 철도를 완성함에 따라 종착역으로 정한 이 고장을 새로운 의주, 즉 신의주라 이름 짓고,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으려고 많은 일본인을 이주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야욕은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가 완성되어 만철(滿鐵)의 안봉선(安奉線)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한층 강화되었다.

신의주에 일본이 설치한 기관으로는 1905년 1월 신의주역의 신설에 이어, 1905년 4월 한국정부에서 통신사업 일체를 일본에 위탁하자, 같은 해 7월 의주우편국 신의주출장소를 설치했다가 10월에 신의주우편국으로 독립시켰다. 다음은 세관으로서 1906년 4월에 진남포세관 신의주지서를 설치했다가 1910년 9월 개항지로 지정되자 신의주세관으로 승격시켰다.

행정기관은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전국 주요 도시에 이사청(理事廳)을 두게 됨에 따라 신의주에도 같은 해 11월 이사청이 설립되고, 또 경찰서가 신설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와 더불어 이사청이 폐지되고 의주부청으로 개칭되었다. 법원은 1910년 11월 평양지방재판소 관하에 신의주지부를 설치하고, 1922년 7월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승격시켰다.

1908년 7월 사법 및 감옥사무 일체를 일제가 장악함과 동시에 신의주이사청감옥과 의주분감(義州分監)을 폐지했으며, 1909년 11월 평양감옥신의주분감을 설치했다가 1920년 신의주감옥으로 승격하고 1923년 5월 신의주형무소로 개칭하였다. 신의주형무소는 이곳이 철교를 건너 만주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활발해 자연히 사상관계 구속자가 많았다.

이 밖에 1927년 11월에 상공회의소가 설립되었다. 영림서(營林署)는 조선 말의 영림창을 거쳐 1910년 조선총독부영림창이 되었다가 1925년 6월 신의주영림서로 개칭되어 압록강 일대의 삼림채벌과 뗏목정리, 제재·원목판매 등의 막대한 이권을 독점하였다.

또 1917년 12월 뗏목소화책의 일환으로 신의주 동쪽 마전동 벌판에 조선제지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가 1922년 12월 왕자제지회사로 개편되었다. 1938년 5월에는 신의주·다사도(多獅島) 사이의 다사도선이 개통되었다.

이 시가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로서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도청의 이전에서 찾을 수 있다. 1895년 지방제도를 개혁해 부군제(府郡制)를 실시하고, 1896년 8월 다시 13도제로 개편했는데, 이 때 평안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다.

당시 평안북도의 행정조직은 1부 21군으로 나뉘어 처음에는 도청을 영변에 두었다가 1911년 의주로 옮겼으며, 신의주는 의주부의 광성면·마전동·미륵동·만포동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1914년 4월 의주부를 신의주로 옮겨 신의주부라 하고 19동으로 확장했으며, 도청 소재지로 지정하였다. 이곳이 국제도시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함에 따라 1921년 11월 도청을 이곳으로 옮겼다.

1923년부터 6년간 계속사업으로 시가지정리 및 제방공사를 시행하고 1929년 4월 행정구역을 확장해 1930년에는 인구 4만5000여 명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1934년에 한국인 3만7495명, 일본인 8,007명, 외국인 5,836명, 1940년에 한국인 4만3298명, 일본인 9,431명, 외국인 7,712명으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비율이 각각 27%, 28%나 되었던 것은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1941년 3월에는 제3차로 행정구역을 확장해 의주의 광성면과 고진면 전역을 편입시킴으로써 43개 동이 새로 생겨 62개 동으로 늘어났으며, 면적은 1914년의 약 127만 평보다 12배가 넘는 큰 도시로 팽창, 인구 20만 명 이상을 포용할 수 있는 면적을 가지게 되었다. 1943년 5월 호수는 2만4763호, 인구는 12만7535명으로 증가했으며, 신의주부는 광복 후 시로 개편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의 발전시기에 배출된 인물로는 국어학자 유창돈(劉昌惇), 교육자 고병간(高秉幹), 목사 이기선(李基宣)·김관근(金灌根)이 있다. 독립운동가로는 33인에 속하는 양전백(梁甸伯)·유여대(劉如大),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오동진(吳東振)·박희정(朴熙禎), 독립단원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사형 또는 전사한 고득수(高得秀)·박성흠(朴聖欽)·백운한(白雲翰)·백의범(白義範)·최시흥(崔時興)·홍학순(洪學淳) 등이 있다.

3·1운동 때 이곳에서는 일본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기회를 엿보다가 3월 30일 많은 시민이 궐기,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본군경의 발포로 첫날부터 사상자를 내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집회횟수 3회, 집회인수 5,300명, 사망자수 5명, 부상자수 25명, 투옥자수 954명이었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연통제는 1919년 12월 독판(督辦)을 두어 1대 조병준(趙秉準), 2대 안병찬(安秉瓚)이 임명되었다.

유물ㆍ유적

거란족을 비롯한 북방의 이민족 침입을 막기 위해 1033년(덕종 2) 평장사 유소(柳韶)에게 명해 쌓게 한 천리장성의 기점이 성외동고성(城外洞古城)으로서, 축면산(縮緬山)을 거쳐 의주가도의 의주군 고성면 연하리와 운산군·희천군을 지나 평안남도 영원군까지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함경남도 정평군까지 이르는데, 이 성을 ‘만리장성’이라고도 한다.

성곽높이 4∼5m, 너비 3∼4m, 성벽 밑의 너비 14∼15m인 토축과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천리장성은 9개의 성이 연이어 포함되는데, 신의주시에는 성외동고성을 기점으로 해 서린동고성(西麟洞古城)·연상동고성(蓮上洞古城) 등 2개의 수성(守城)이 있다.

서린동고성은 631년(고구려 영류왕 14)에 축성되었다고 하며, 이곳에서는 고구려시대의 토기와 철제창을 비롯해 철제화살 등이 출토되었다. 또 성곽 안에는 건물의 주초석(柱礎石)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건물구조와 크기를 나타내는 유구품이 되고 있다.

교육ㆍ문화

근대교육기관으로 1909년에 신의주공립심상소학교가 처음 개교했고, 1913년에 공립 약죽심상소학교(若竹尋常小學校)가 개교했으며, 사립으로는 1912년에 신명학원(新明學院)이 설립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21년에 신의주동공립중학교가 개교했으며, 1936년에 신의주남공립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26년에 일본인 전용인 신의주공립중학교와 1929년에 신의주공립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

실업계 학교로는 1921년에 개교한 신의주공립상업학교, 삼무학교(三務學校)의 후신인 평안중학교, 1941년에 개교한 제일공업학교·제이공업학교 등이 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1개교, 중학교 9개교가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7개, 천도교교당 1개, 천주교성당 1개, 개신교교회 12개가 있다.

이 지방에 전하는 설화 중 〈어리석은 형과 현명한 동생(愚兄賢弟)의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어머니와 아들 형제가 살았는데, 작은아들은 영리하고 재주가 많은데 큰아들은 모자란 아이였다. 하루는 동생이 들짐승을 잡기 위해 뒷동산에다 덫을 놓았다.

다음 날 동생은 형에게 뒷동산에 가서 덫에 무엇이 걸렸나 보고 오라고 하였다. 형이 가 보니 노루가 덫에 걸려 있는데, 건넛집 송아지가 걸렸구나 생각하고 놓아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동생이 덫에 무엇이 걸렸냐고 물으니, 건넛집 송아지가 걸려서 그냥 놓아주고 왔다고 하자, 그건 송아지가 아니고 노루였다고 하였다.

또 다음 날 덫에 꿩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건넛집 수탉이 걸렸다고 생각하고 놓아주었다. 형은 동생에게 건넛집 수탉이 걸려 있어서 놓아주고 왔다고 하였다. 동생은 그건 수탉이 아니고 꿩이라고 하면서 다시 산에 가면 덫에 무엇이 걸려 있든지 놓아주지 말고 잡아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어머니가 덫에 걸렸는데도 놓아주지 말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 어머니가 놓아 달라고 해도 놓아주지 않고 그냥 집으로 왔다. 그러는 도중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그 밖에도 몇 가지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산업ㆍ교통

수륙교통이 편리한 신의주는 국경무역 및 압록강 목재의 집산지이다. 울창한 산림지대인 압록강 상류에서 채벌한 원목은 뗏목으로 엮어져 만포진·신의주 등 하류로 벌류된다. 따라서 신의주는 제재·펄프·제지·성냥 등 목재를 원료로 하는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수풍댐 건설 이후 압록강 목재 뗏목의 유하(流下)가 줄어들고, 만포선이 개통된 뒤에는 목재집산지로서의 기능이 더욱 감소하였다. 오히려 수풍수력발전소의 방대한 전력자원을 배경으로 제유(製油)·화학·제련·경금속·정미·제분·방적·기계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무역은 주로 안동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목재·펄프·지류(紙類)·광물·쌀·직물·잡화류를 수출하고, 콩·밤·야채·주류·은·사탕 등을 수입한다. 예로부터 신의주와 안동간의 국경을 넘나들며 교역을 했던 잠상(潛商)이 유명하다.

시장은 5개의 상설시장이 있다. 시영시장으로 하동에 의주통장, 영동에 신의주장이 있고 민영시장으로는 노송동장이 있으며, 미륵동에 채과조합에서 운영하는 평북채과시장이 있고, 압천동에 평북어업조합연합회에서 경영하는 신의주어시장이 있다.

신의주는 경의선의 종점이며, 압록강철교를 통해 만주의 안봉선·남만선과 연결되어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연결되는 국제교통의 관문이다. 시의 남부에는 외항을 잇는 다사도선이 뻗어 있다. 도로는 압록강을 따라 혜산진과 이어지는 국경도로와 남으로는 서울방면의 경의국도가 있다.

신의주는 압록강에 토사의 퇴적이 심하고 유심(流心)이 안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신의주 쪽은 수심이 얕으므로 하항으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으나, 만조 때는 500t급 기선이 운항할 수 있다. 마전동에 비행장이 있다.

신의주시(북한)

평안북도 북서부에 있는 시. 동쪽은 의주군과 피현군, 남쪽은 용천군, 서쪽과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단둥(丹東)과 접경을 이루는 국경의 관문도시이다. 동경 124°20′∼124°33′, 북위 40°01′∼40°11′에 위치하며, 인구는 31만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4년 10월 유하리 일부를 분리해 평안북도 우시군 우시읍에 편입하고, 1961년 3월 본부동·백운동·도서동 일부를 분리해 신원동에 편입하였다. 1963년 5월 탑리를 송한리에, 신풍동을 마전리에 각각 편입해 마전리를 마전동으로 개칭하였다. 광성읍을 분할해 유상동·와이동을 신설하고, 광성읍은 폐지, 백토리 일부를 분리해 와이동에 편입하고, 낙원동으로 개칭하였다.

행정구역은 압강(鴨江)·개혁(改革)·남하(南下)·신원(新元)·백운(白雲)·남중(南中)·남서(南西)·본부(本部)·평화(平和)·동하(東下)·백사(白沙)·균화(均化)·신포(新浦)·동중(東中)·청송(靑松)·역전(驛前)·민포(敏浦)·채하(彩霞)·마전(麻田)·미륵(彌勒)·남상(南上)·친선(親善)·수문(水門)·해방(解放)·남송(南松)·관문(關門)·신남(新南)·동상(東上)·와이(瓦耳)·유상(柳上)·연상(連上)·낙원(樂元)·풍서(豊西)·방직(紡織)·낙청(樂淸) 등 35개 동과 상단(上端)·하단(下端)·선상(仙上)·송한(送鷳)·석하(石下)·중재(中齋)·삼교(三橋)·삼룡(三龍)·백토(白土)·토성(土城)·성서(城西)·남민(南敏)·유초(柳草) 등 13개 이로 되어 있다.

[자연환경]

압록강 하류연안에 자리잡고 있어 전반적으로 평탄한 평야지대로 되어 있다. 시의 중심부는 해발 평균높이 5∼10m로 매우 낮으나, 동쪽과 서쪽으로는 군데군데 50∼100m 정도의 언덕들이 있다. 북부와 서부에는 위화도·유초도 등 10여 개의 섬들이 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내나 바다와 가까워 해양성 기후의 특성도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8.8℃, 1월 평균기온 -8.7℃, 8월 평균기온 24.1℃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058㎜이다. 첫서리는 10월 28일경, 마감서리는 3월 26일에 내린다.

산림은 시면적의 약 8%이며 주로 북동부일대에 퍼져 있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와 참나무이다. 토양은 대부분 충적지토양과 논토양이며, 석탄이 매장되어 있다.

[인문환경]

이 시는 주요 공업지구로 개발되어 기계·화학·방직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계공업에서는 각종 기계, 화학공업에서는 화학섬유와 종이 생산이 대표적이다. 신발과 화장품 생산도 북한 전체에서 비중을 차지하며, 특산물로는 각종 법랑철기가 있다.

신의주공업지구는 수풍발전소와 천마발전소를 끼고 있는 등 양호한 공업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북한 유일의 디젤엔진공장인 북중기계공장을 비롯해 화학섬유·조선·중기계·수산물가공·제지 및 방직공업이 발달해 있다. 신의주모방직공장은 종업원 3,500명이고 연간 생산능력은 방모사 1만8000t(스테이플 파이버 70%, 양모 30%), 방모직물 450만m, 염색가공 5,370m이다.

1988년 6월 김정일이 신의주 시찰 도중 내린 지시에 따라 남신의주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의주는 공업도시인 함흥과 나진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인 데다 중국의 단둥과 압록강대교를 통한 왕래가 빈번함에 따라 평북도당 주관으로 각지의 인력을 차출해 개발현장에 투입하였다.

이 지역에는 3만 세대의 주택과 학교·유치원·극장·호텔·학생소년궁전·광장·체육시설이 건립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압록강과 연결되는 운하와 철도, 지하망 공사 등도 건설해 수송력을 증대하기로 하였다.

신의주 강·하천건설사업소의 기술자들이 무동력 삭도(케이블카)를 개발해 전국에 보급함에 따라 각지의 건설사업소에서 많이 활용하게 되었다.

신의주시는 1988년 4월 1일부터 중국인들의 방북이 허용되면서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만주 단둥시(丹東市)에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시까지 한정된 구간에 허용되었다.

1989년 12월부터는 중국측에서 북한 내 관광여행상품 개발을 계기로 평안북도에 한해 3일간 여행이 가능하도록 연장되었다. 1988년경부터 관광지 조성계획의 일환으로 압록강에 여러 척의 관광선을 취항시키고 있다.

1988년 4월 유엔개발계획의 자금과 기술자원으로 평양∼신의주간 95㎞ 자동신호 정지장치 등 철도사령(司令) 자동화공사를 완공하였다. 이 공사로 1.2배 정도의 수송력 향상 효과를 가져왔다.

1991년 2월 10일에는 신의주에 가성소다공장 착공식을 가졌다. 연건평 1만7000㎦에 2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서게 되며 130여 종, 740여 대의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서해안의 수산기지이며, 삼치·전어·멸치·오징어·숭어·농어·굴 등의 어획이 많다.

신의주는 평의선의 종점이며 여기서 중국으로 통하는 철도가 이어진다. 평의선의 남신의주역에서는 덕현선(남신의주-의주-덕현)과 백마선(남신의주-피현-염주)이 갈라진다. 도로는 신의주∼평양, 신의주∼의주, 신의주∼피현간을 잇는다.

신의주항을 통해 압록강 하류의 섬들과 용암포-비단섬-철산-정주-남포-해주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화물수송이, 압록강 상류로는 의주-옥강-청성까지의 구간에서 화물과 여객 수송이 이루어진다.

신의주-유초리-황금평리-비단섬 사이에 여객선이 다닌다. 교육기관으로는 차광수대학·관서대학·광제대학·만풍대학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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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7)
『신한국지리』(강석오, 새글사, 1977)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77)
『인물의 고향-북한편-』(, 중앙일보사, 1978)
『북한의 관광자원』(한국관광공사, 1977)
『조선중앙연감』(조선중앙통신사, 1977)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77)
『북한의 산업』(대한무역진흥공사, 1977)
『지방행정구역요람』(내무부, 1973)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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