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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또는 신분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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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또는 신분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물건.
내용

쓰개는 머리를 보호하는 두의(頭衣)로서 발생한 것인데 점차 장식적, 신분의 표지 등으로 발전한 것이다. 쓰개의 발생은 건국 당시에도 의관정제(衣冠整齊) 하였다고 하므로 의복의 발생과 같은 시기라고 추측된다.

삼국시대의 쓰개는 중국의 ≪사기 史記≫, 우리 나라의 벽화에 의하면 절풍(折風) 계통의 절풍·나관(羅冠)·소골(蘇骨) 및 조우를 꽂은 관(鳥羽冠) 등이 있었다. 책(幘) 계통의 관, 머리수건 계통의 건(巾幗)·흑건(黑巾), 입(笠) 계통의 것과 투구가 있었다. 그리고 출토유물로는 금관류와 화피관(樺皮冠)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의 기록에 의하면 진골대등(眞骨大等)에서 평인에 이르기까지 견직물로 만든 복두(幞頭)를 썼다. 진골여(眞骨女)와 6두품여(六頭品女)는 견직물로 만든 화관(花冠)을 썼고, 5두품여 이하는 무관(無冠)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하면 주로 복두를 썼다.

왕은 상복(常服)에 오사고모(烏紗高帽), 제복(祭服)에 면관(冕冠), 연복(燕服)에 조건(皂巾)을 썼다. 군복에도 복두를 썼으며, 금화대모(金花大帽)·피변(皮弁)·피몽수(皮蒙首)·문라두건(文羅頭巾) 등이 있었다. 일반에서는 조건·문라건 등을 썼다고 본다. 여자의 쓰개로는 일명 개두(蓋頭)라고 하는 몽수(蒙首)가 있었다.

원(元)나라에서 전해진 족두리와 신라시대부터의 화관이 부녀자의 예관(禮冠)으로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면류관(冕旒冠)·원유관(遠遊冠)·익선관(翼善冠), 백관의 금관(양관)·복두·사모·이암, 녹사(錄事)의 평정건(平頂巾), 학생의 치포건(緇布巾), 별감(別監)의 자건(紫巾)·주황초립(朱黃草笠)·청건(靑巾), 나장(羅將)의 조건(皂巾), 사족(士族)과 서인(庶人)의 흑립(黑笠)과 초립(草笠)이 있었다.

군복에는 벙거지[戰笠]를 썼으며, 편복(便服 : 一般服飾)에는 입자(笠子) 계통의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초립·흑립과 관(冠) 계통의 정자관(程子冠, 朱子冠)·동파관(東坡冠)·방건(方巾) 등 그 종류가 많았다. 그리고 방한용인 난모계(暖帽系) 쓰개와 여자들이 몸과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쓰던 내외용 쓰개가 있었다.

조선시대 초엽부터 말기까지 평인 남녀 모두가 방한용 난모를 사용하였다. 형태는 정수리가 뚫려 있고 이마에서부터 귀와 볼을 가릴 수 있으며, 목뒤까지도 덮을 수 있었다. 재료는 주단류에 모피(毛皮)를 대어 만들었다. 정수리가 뚫려 있어 위생적이면서 따뜻한 두의였다.

명칭은 이암(耳掩)·휘항(揮項)·풍차(風遮)·소풍차(小風遮)·삼산건(三山巾)·호항(護項)·호이암(胡耳掩)·피견(披肩)·만선두리(滿縇頭里)·말액아암(抹額兒掩) 등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남바위·조바위·아얌·풍차·굴레 등 명칭과 종류가 다양해졌다.

이들 쓰개는 조선 후기 이전에는 상류사회의 난모였으나 후기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착용되었다. 그 착용과정과 구성의 실태는 다음과 같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난이파겹호항난모변증설 煖耳袙袷護項煖帽辯證說>에서는 난모에 대하여 “우리 나라 난이(煖耳)의 제도는 공사(公私)·귀천(貴賤)·문무(文武)간에 스스로 착용하는 구별이 있었다. 사가(私家)에서는 문무·귀천의 구별 없이 휘항·호이암·풍차의 제도가 있어 모(毛)·겹의(裌衣)·흑단(黑緞)·갈포(褐布)를 가지고 만들어 썼다. 무신의 공복(公服)에는 만선두리를 착용하였는데, 그 제도가 모휘항의 앞뒤와 가장자리에 초피(貂皮)로써 선(縇, 緣)을 둘렀기 때문에 이름지어졌다. 조사(朝士)에 연로(年老)한 이는 궐내를 나오면 소풍차를 착용하였으니 항풍차(項風遮) 또는 삼산건(三山巾)이라고도 하였다. 문(文)·음(蔭)·무(武)의 공복 모대에는 10월 초하루에서 정월 말일에 이르기까지 사모에 난모를 썼는데, 당상관은 초(貂)를 사용하고 당하관은 서(鼠)를 사용하였다. 속명은 이암이라 하였으며, 그 모양은 밖은 모(毛)이고 안은 주(紬)이며 단원(團圓)이 매우 크고 뒤에다 꼬리를 늘여 이상하였다. 그러나 상착하여 풍속을 이루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다.”라 하였다.

그리고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는 “지금의 이암은 옛날에는 피견(披肩)이라 하였다. 중국에서는 난이(煖耳)라고 하였으며 성동(盛冬)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명령이 내린 연후에 백관이 비로소 이를 쓸 수 있었다. 금상(헌종)께서 10년(1884) 겨울 이암을 개조하라는 명이 있어 제신들의 의론을 모아 이에서 소풍차·삼산건으로 하되 외연을 당상관은 초피, 당하관은 흑피로써 선을 두르게 하여 윤허를 받아 반포함으로써 무신의 만선두리와 함께 이암의제가 개혁되었다. 금상(헌종)이 즉위 후 이암이 구제로 돌아가기 10여년 전부터 경피(獍皮)로 한 말액아암(抹額兒掩)의 제가 있었다. 겉은 모로 하고 안은 주로 하여 두르기를 수질(首絰)과 같이 하였으며 뒤에는 흑단으로 만든 쌍으로 된 소수(小綬)가 달렸다. 다시 끈을 달아 갓을 벗지 않고도 쓰고 벗을 수 있도록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어 상하가 통용하였다. 휘항이라고 하는 명칭은 바른 것이 못되며, 정약용이 ≪필언각비 疋言覺非≫에서 호항(護項)을 가지고 바른 것이라고 한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로써 난모계 쓰개의 형태와 용도, 변화과정 그리고 명칭을 알 수 있다. 이암이 널리 사용됨에 따라 1432년(세종 14)에 이암의 사용법을 정하였으며 1444년 이암의 사용제도를 정하기에 이르렀으며, 만드는 과정에서도 신분의 귀천에 따라 재료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1472년(성종 3)의 ≪금치사절목 禁奢侈節目≫에서는 서인의 남자나 여자들이 초피나 청서피(靑鼠皮)로써 옷을 하거나 이암을 하는 것을 금하였다.

다만 여인의 서피 사용은 금하지 말라 하였다. 이로써, 이암이 귀천 구별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이 잘 지켜지지 않아 1517년(중종 12) 함경북도 평사(評事)의 상언(上言)에 의하면, 애초에는 당상관이 아니면 초피이암을 할 수 없었는데 중년(中年)에 금령이 해이해져 하류천인(下流賤人)도 이암을 하고 부녀자들은 초피가 없으면 행세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렵다 하였다.

1553년(명종 8)에는 착립시(着笠時)의 이암 제도를 상정한 바 있다. 그 절목에 의하면, 당하관 및 사족은 서피·왜산달피(倭山獺皮)이고, 제핵관원·군사(軍士)·서얼(庶孽)·이서(吏胥)는 적호피(赤狐皮)·경산달피(卿山獺皮)이다. 공상·천례(賤隷)는 산양피·구피(狗皮)·묘피(猫皮)·지달피(地獺皮)·이피(狸皮)·토피(兎皮)이고 천여인의 모관(毛冠)·차수(遮首)도 공상·천례와 같다고 정하였다.

≪경국대전≫ 관의 이암조에는 당상관이 단(段)에 초피이고, 당하관은 궁초(宮綃)나 초에 서피라고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귀부인들은 몽수(蒙首)로써 얼굴과 몸을 가리고 출입하였다. 몽수는 일명 개두(蓋頭)라고 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멱리(羃䍦)·유모(帷帽)·개두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생활 규범에 의하여 여성의 내외가 엄격해지면서 내외용 쓰개가 일반화되었다.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너울[羅兀]·쓰개치마·장옷·천의·삿갓·전모 등이 있었으나 개화와 더불어 없어졌다. 그 착용과정은 다음과 같다. ≪고려도경≫ 여기조에는 “고려의 공경부인이나 귀부인이 출입할 때는 말과 복(僕)과 청개(靑蓋)가 공급되고 뒤따르는 이가 두세 사람이다. 그리고 조라(皂羅)로 된 몽수를 착용하였다. 옛 당나라 무덕연간(武德年間, 618∼626)과 정관연간(貞觀年間, 627∼649)에 궁인(宮人)들이 말을 타고 멱리로써 온몸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에서 몽수를 보니 당나라의 멱리와 같다.”고 하였다.

≪진서 晉書≫ 서융(西戎) 토곡혼전(土谷渾傳)에 남자 통상복에 장군(長裙)을 입고 유모 또는 멱리를 썼다고 하여 멱리는 서융 계통의 쓰개라고 한다. 멱리의 형태는 ≪중화고금주 中華古今注≫에 방건(方巾)으로 머리에 쓰면 온몸을 가릴 수 있는 길이이고 증백(繒帛)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몽수의 착용에 관하여 ≪고려도경≫ 귀부조에서는 “조라로 된 몽수를 쓰는데 3폭으로 만들고 길이는 8척이다. 머리 정수리로부터 늘어뜨려 쓰며 얼굴과 눈만 내놓고 땅에 끌리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부인 비첩조(婢妾條)에서는 “일을 하고 시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몽수를 아래로 늘어뜨리지 않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 올려놓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시대는 일반적으로 몽수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숙종대까지의 문헌에 얼굴과 몸을 가리는 쓰개로 입모(笠帽)와 개두가 기록되어 있고, 광해군 이후는 개두와 너울이 기록되어 있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숙종대까지는 나화[汝火], 영조대 이후는 너울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는 너울과 개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전과 빈궁은 자적라(紫的羅), 그 밖의 여자들은 조라 또는 흑주로 만들었다.

내외용 쓰개로는 장옷·쓰개치마·삿갓·전포 등이 있었으며, 주로 중인급 이상에서 착용하였다. 장옷은 지방에 따라 혼례복이나 저승으로 돌아갈 때의 수의로도 사용되었다. 내외용 쓰개는 개화기 때에 없어졌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고려도경(高麗圖經)』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집필자
박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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