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인 ()

양곡집
양곡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징(元徵)
양곡(陽谷)
시호
충정(忠貞)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24년(인조 2)
사망 연도
1689년(숙종 15)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공조참판|호조참판|경기도관찰사|공조판서|형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오정방(吳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오상(吳翔)이다.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효길(李孝吉)의 딸이다. 숙부 오숙(吳淑)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년(현종 2) 헌납(獻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 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명곡집(明谷集)』
『양곡집(陽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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