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목판본이며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445년에 노래의 본문과 한시가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을 한문으로 기록한 글이 1447년에 완성되어 간행으로 이어졌다. 본문과 그것을 풀이한 한시는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1년 전에 만들어졌으므로, 이 노래는 훈민정음으로 적힌 글로서는 가장 앞선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국문시가로서, 그리고 악장의 독자적 형식을 개척한 첫 작품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목판본. 총 10권. 현재 전하는 판본은 모두 목판본이나 세종대의 초간본은 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고판본으로는 가람문고본 · 일사문고본과 규장각본이 있다. 그 중 원본에 가까운 것은 가람본이나 1 · 2권 뿐이고, 규장각본도 가람본과 같으나 후쇄본이어서 탈자와 탈획이 많다. 그 밖에 『세종실록』에 소재된 실록본이 있고, 1612년(광해군 4)에 간행된 만력본, 1659년(효종 10)에 간행된 순치본,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건륭본 등이 있다. 이 중에 만력본은 규장각도서의 태백산본과 오대산본의 2종이 있다. 둘 다 오자가 있으며 일제시대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오대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기타 판본과 대교하고 수정 보완하여 영인한 바 있다.
지은 목적은 임금이 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하여,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후대 임금은 이렇게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경계하려는 데 있다. 만든 경과는 이 책의 첫머리에 실린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과 끄트머리에 실린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에 잘 나타나 있다.
첫머리의 글에 따르면 권제(權踶) · 정인지(鄭麟趾) · 안지(安止) 등이 여섯 대 선조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었는데, 그것은 1445년(세종 27) 4월의 일로 이때에 지은 노래는 우리말로 되어 있고, 거기에 한문의 시를 달아 그 뜻을 풀이하였다는 것이다. 끄트머리의 글은 그보다 두 해 뒤인 1447년 2월에 된 것인데, 이에 따르면 1445년에 권제 · 정인지 · 안지가 125장의 노래를 지어 올렸더니, 세종은 기뻐하여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내렸다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은 비록 역사책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다 펴보기가 어려운 일이므로, 박팽년(朴彭年) · 강희안(姜希顔) · 신숙주(申叔舟) · 이현로(李賢老)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 신영손(辛永孫) 들에게 주해를 붙이게 하여 10권의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1445년에 노래의 본문과 한시가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한문으로 된 글은 1447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된 경과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세종 27년 4월조에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리니, 임금은 판새김을 명하였으나 곧 출판되지 않았음은 그 끄트머리 글이 1447년에 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데, 세종 29년 10월에는 「용비어천가」 550질을 신하들에게 내렸다고 적혀 있다. 곧, 1445년에 본문과 한시가 되고, 이어 역사사실에 대한 주해를 붙여 1447년에 완성되어, 그해 안에 간행된 것이다. 다만, 1445년에 된 본문도 10권으로 되었던 것인지 약간 의문이 남는다. 또, 「용비어천가」 옛 판본에 의하면 125장이 123장으로 씌어 있으니, 아마 본디는 123장으로 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용은 세종의 직계 할아버지 여섯 분의 행적을 읊은 것인데, 이 행적은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었다는 중국의 제왕의 그것과 부합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 여섯 선조도 역시 하늘의 명을 받고 있었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 책은 10권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내용에 따른 분권이 아니고, 그 분량에 따른 것인데, 그 내용에 따라서도 역시 10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해동 여섯 용이 날아 일마다 하늘이 주신 복이니, 이것은 옛 성인들의 고사와 부합한다는 제1장은 전체의 서문에 해당되며, 제2장은 모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될만한 까닭이 있음을 물과 나무에 비유하여 강조한다.
② 3∼8장까지는 조선왕조의 시조인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할아버지들의 행적을 노래한 것인데, 이것을 살펴보면 이미 이때부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③ 9∼14장까지는 태조의 위화도회군에서 한양천도에 이른 경위를 약술하고 있다. 위화도회군으로 민심이 태조에게로 모였으나 고려왕조를 지키려 하였고,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용납되지 않아서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④ 이씨가 왕이 될 조짐은 벌써 고려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표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15∼26장).
⑤ 27∼46장까지는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와 하늘의 도움을 받은 신기한 기적을 기술하였다.
⑥ 47∼62장까지는 태조가 가장 큰 무공을 세운 왜적과의 싸움을 주로 노래하고 있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매우 귀찮은 존재였는데, 태조는 이들도 무력과 덕으로 다스렸다는 것이다.
⑦ 63∼85장까지는 태조의 활쏘기 재주뿐 아니라 그의 학문과 인격을 기리며, ⑧ 86∼89장까지는 중국의 이른바 성인의 행적을 앞세우고 있는 지금까지의 노래의 격식을 깨뜨려 중국의 일을 앞세우지 않고, 태조의 신력(神力)과 신무(神武)와 신공(神功)을 기리면서 그에 대한 칭송을 끝맺고 있다.
⑨ 90∼109장까지는 태종의 용모 · 인품 그리고 하늘의 도움을 받은 일들에 대하여 노래하고, 그 부인의 내조의 공이 많았음을 기리며, ⑩ 110∼125장까지는 뒷임금들을 경계하는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용비어천가」의 본문과 그것을 풀이한 한시는 1445년, 곧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1년 전에 만들어졌으므로, 이 노래는 훈민정음으로 적힌 글로서는 가장 먼저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 문체는 유창하여, 처음 글자를 만들어 쓴 민족의 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것은 아마 그 이전 시기로부터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노래의 영향이 아닐까 짐작된다.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제2장)
이 제2장은 한자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로 된 것으로서 그 시상도 매우 좋다. 한문에 젖은 선비들이 처음 우리 글자를 쓰기 시작한 문체로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장의 노래도 한자말이 극히 한정된 것들, 한자말이 꽤 섞인 것들, 때로는 많은 한자말과 한문식 말투가 섞인 것도 볼 수 있다. 특히, “頤指如意ᄒᆞ샤 罰人刑人ᄒᆞ○제(제115장)”, “敵王所愾ᄒᆞ샤 功蓋一世ᄒᆞ시나(제117장)”, “性與天合ᄒᆞ샤ᄃᆡ 思不如學이라 ᄒᆞ샤(제122장)” 따위는 한문에 우리말 토를 단 말투이다. 「용비어천가」의 문체는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을 많이 발굴하여 쓰기도 하였으나, 전 시기에 성행하였던 이두글의 찌꺼기도 아직 많이 섞여 있음이 그 특색인데, 이러한 특색은 그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 온다.
맞춤법과 한자음 표기를 살펴보면, 15세기 문헌의 표기법은 대체로 표음적 표기로 원형이 전혀 밝혀지지 않고, 소리대로 적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표기는 원형을 고정하려는 노력이 약간 엿보인다. 곧, 좇거늘(30장), 빛나시니ᅌᅵ다(80장), 깊고(34장), 높고(34장), 새닢 나니ᅌᅵ다(84장), 곶 됴코(2장) 등에서는 원형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표기와 다른 점은 형태소를 분간하려고 하지 못하였다는 일이다. 곧 기픈 (2장), ᄇᆞᄅᆞ매(2장), 여르시니(3장), ᄠᅳ디시니(4장), 안ᄌᆞ니(7장), 올ᄆᆞ니ᅌᅵ다(14장) 등에서는 형태소의 경계가 표시되지 않는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사잇소리를 적는 데 여섯 초성글자가 쓰이고 있으며, 그 쓰는 법은 다음과 같다. 앞소리가 울림(유성)의 ‘ᄠᅳᆷ, ㄴ, ㅁ, ㄹ, 홀소리’인 경우에 사잇소리가 나타나게 되는데, 아랫말의 첫소리가 안울림소리(무성음)인 경우에 나는 사잇소리는 ‘ㄱ, ㄷ, ㅂ, ㆆ, ㅅ’으로 적고, 울림소리(유성음)인 경우에 나는 사잇소리는 ‘ㅿ’으로 적는데, 앞의 다섯 글자의 쓰이는 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ㄱ’은 ‘ᄠᅳᆷ’ 다음에─兄ㄱᄠᅳ디(8장)
‘ㄷ’은 ‘ㄴ’ 다음에─몃間ㄷ지븨(110장)
‘ㅂ’은 ‘ㅁ’ 다음에─사○ᄠᅳ디리ᅌᅵᆺ가(15장)
‘ㆆ’은 ‘ㄹ’과 홀소리 다음에─하○ᄠᅳ들(68장), 先考ㆆᄠᅳᆮ(12장)
‘ㅅ’은 이 모든 경우에 통용될 수 있음─定社之聖ㅅ긔(99장), 狄人ㅅ서리(4장), 님○德(118장), ○ᄀᆞᅀᅢ(58장), 나랏小民(52장)
‘ᅀᅠ’은 아랫말의 첫소리도 울림소리인 경우에 쓰인다.―나○일훔(85장), 天子ᅀᅠᄆᆞᅀᆞᄆᆞᆯ(85장), 바○우희(83장), 오○나래(16장), 님○말(98장)
맞춤법에서 「용비어천가」 · 「월인천강지곡」 · 「석보상절」이 각각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듯이,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이 세 문헌은 각각 다르다. 「석보상절」에서는 한자 밑에 『동국정운』의 한자음을 정음으로 달았고,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자말마저 정음을 앞에 두고 그 밑에 한자를 달았는데, 「용비어천가」에서는 한자말에 음을 달지 않았다. 그것은 「용비어천가」가 『동국정운』 이전 문헌이기 때문이다.
음운 · 어휘를 살펴보면, 이 책의 음운현상으로 두드러진 특색은 홀소리고룸(모음조화)이 매우 규칙적이란 점이다. 다른 문헌은 「용비어천가」처럼 규칙적인 홀소리고룸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한 형태소 안에 있어서의 홀소리고룸이나, 토씨와 씨끝의 첫머리에서 갈음되는 ‘아/어’, ‘ᄋᆞ/으’, ‘오/우’의 용법은 「용비어천가」에서 가장 규칙적이다. 다만, ‘업사’(110장), ‘연ᄌᆞ니’ (7장), ‘밧긔’(89장) 따위 몇 가지 예외가 나타남에 불과하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음운현상으로는 ‘○’의 쓰임이다. 「용비어천가」에서는 ‘글ᄫᅡᆯ’(26장), ‘ᄃᆞᄫᆡ-’(98장), ‘셔ᄫᅳᆯ’(18 · 35 · 37 · 49 · 98장), ‘스ᄀᆞᄫᆞᆯ’(35장), ‘조ᄏᆞᄫᅳᆯ’(2 : 22), ‘이ᄫᅳᆯ-’(84 · 89장), ‘ᄒᆞᄫᆞᅀᅡ’(35 · 37 · 61장) 따위 말에 ‘○’이 쓰이고 있는데 불과 몇 년 뒤에 된 「석보상절」 · 「월인천강지곡」 따위에서는 이 소리가 변한 것으로 적혀 있다. 곧, ‘글ᄫᅡᆯ’은 ‘글왈’(석보상절 9 : 37 따위)로, ‘ᄃᆞᄫᆡ-’는 ‘ᄃᆞ외-’(석보상절 9 : 7, 천강곡 기5 따위)로─다만 뒷가지인 경우에는 ‘ᄃᆞᄫᆡ-’가 쓰임.─‘스ᄀᆞᄫᆞᆯ’, ‘조ᄏᆞᄫᆞᆯ’의 ‘ᄀᆞᄫᆞᆯ’은 ‘ᄀᆞ올’(석보상절 19 : 1 따위)로, ‘이ᄫᆞᆯ-’은 ‘이울-’(월인석보 서 : 16), ‘ᄒᆞᄫᆞᅀᅡ’는 ‘ᄒᆞ오ᅀᅡ’(월인석보 서 : 1, 천강곡 기20 따위)로 나타난다. 이로써 보면 이 시기가/○/ 변화의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에는 한문투 표현이나 한자말이 상당히 섞여 있는 점이, 현대문의 문체와 비슷하다. 그러나 순수한 우리말의 수효도 상당히 많아서, 약 450 정도(토씨 · 씨끝 제외)가 된다. 그 중 임자씨(체언)가 약 38%, 풀이씨(용언)가 약 50%를 차지한다. 그리고 「용비어천가」의 역사 설명문에는 많은 땅 이름이 나타나는데, 한자에 붙여진 정음은 그때의 땅이름 부르던 법을 알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쇼재(牛峴) · 둥산곶(登山串) · 이○개(圉仍浦) · 투루(禿魯) · 암림곶(暗林串) · 갈두(加乙頭) · 돌개(石浦) · 가막골(加莫洞) · 그○(文音) · 머툰ᄂᆞᄅᆞ(麻屯津) · 울헤셤(威化島) · 학ᄃᆞ리(鶴橋) · ᄌᆡ○골(滓甓洞) · 쇠재(鐵峴) · 션ᄯᅢ(善竹) · 바횟○(巖房) · 합개(合浦) · 오도리(幹朶里), 그 밖에 50개 정도 더 있다.
「용비어천가」는 장르적 성격 규정에서부터 논란이 많다. 역사적 장르로서는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는 국문 악장이라는 점에 누구나 동의하지만, 장르 양식으로서는 다음과 견해 차이를 보인다.
①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룩한 태조와 태종의 영웅적 행적과 덕성을 찬양한 서사시라는 견해(張德順, 成基玉, Lee, P.H., 金仙雅 등), ② 조선왕조 건국의 당위성과 필연성에 관련한 이념적 주제적 교훈적 텍스트의 전형으로서 교술적 서사시(趙東一), 혹은 서사적 교술시(曺圭益)로 보아 교술문학과 관련시키는 견해, ③ 서정장르로서의 악장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서정시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金學成)로 갈라져 있다.
①은 작품의 절대량을 차지하는 본사(本詞) 부분이 ‘고귀한 혈통→비범한 성장→탁월한 능력→투쟁에서 승리’라는 ‘영웅의 일생’구조에 따른 서술단락으로 짜여 있음에 근거를 두고, ②는 작품의 도처에 강한 정치적 이념적 주제성을 드러낸다든가 서두나 결말 부분에 직접적으로 교훈적 요목을 나열한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③은 작품의 화행(話行) 짜임이 각 장의 유기적 연계에 의한 이야기성(스토리 혹은 플롯)을 형성해내는 ‘확장발화’의 진술양식으로 짜이지 않고 반대로 각 장의 완결구조에 의한 독립성을 바탕으로 통사 의미적 서술 차단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억제발화’의 화행짜임을 보임으로써 서정성이 발현된다는 데 근거를 둔다.
「용비어천가」의 장르 양식에 대한 판단은 작품의 전체적인 진술 방식이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인 태조와 태종을 비롯한 육조(六祖)의 사적을 이야기하려 했는가(이 경우 서사시가 됨.), 알려주고 설득하려 했는가(교술시가 됨.), 노래하려 했는가(서정시가 됨.)에 달렸다고 본다.
「용비어천가」의 시적 형식에 대하여는 4언 4구의 시경(詩經)체 한시를 우리말로 언해한 것이라는 견해(趙潤濟)와 종래의 민요체 가운데 4구 2절형을 취한 것이라는 견해(李秉岐), 여요(麗謠)와 조선시대 가사 형식의 중간 형식이라는 견해(金思燁), 연장체와 분절체를 형식적 특징으로 하는 고려속요를 계승하되 뒷 절을 앞 절과 대등한 자격으로 끌어올려 두 절을 철저히 병치시킨 악장 특유의 독특한 형식이라는 견해(成基玉) 등이 있으나 마지막 견해가 가장 설득력을 지닌다.
「용비어천가」의 서술단락(문단) 구조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다. 서사 · 본사 · 결사의 3단 구조로 볼 경우 ① 서사 : 제1장, 본사 : 제2∼109장, 결사 : 제110∼125장으로 보는 견해(조윤제, 김기동), ② 서사 : 제1∼2장, 본사 : 제3∼109장, 결사 : 제110∼125장으로 보는 견해(장덕순, 조동일), ③ 서사 : 제1∼2장, 본사 : 제3∼124장, 결사 : 제125장으로 보는 견해(김사엽, 김선아, 고영화), ④ 서사 : 제1장, 본사 : 제2∼124장 결사 : 제125장으로 보는 견해(박찬수, 양태순, 김학성), ⑤ 서사 : 제1∼16장, 본사 : 제17∼109장, 결사 : 제110∼125장으로 보는 견해(성기옥) 등이다.
「용비어천가」의 각 장을 구성하는 행의 수를 살펴보면 제1장은 1행 형식으로, 제2∼124장까지는 2행 형식으로, 제125장은 3행 형식으로 짜여 있음이 주목되는데 이것이 각각 서사와 본사, 결사로의 서술 단락을 구획 짓는 절대적 의미의 응집력으로 작용함(서술 의미의 변화를 주기 위한 의도적 경계선으로 기능함.)을 고려할 때 ④가 가장 유력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의 각 행은 3개의 구(句)로 짜여져 있고, 이 구를 율격을 형성하는 단위 곧 율격행으로 볼 때 그 율격구조는 제1율격행과 제2율격행처럼 2보격의 형태를 취하는 규칙적 경향성을 보여 고정부라 할 수 있는 부분과, 제3율격행처럼 2보격에서부터 3보격, 4보격에 걸치는 유동적 현상을 보여 가변부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비어천가」가 이처럼 율격이 2음보로 연속되지 않고 가변부에 의해 매 행마다 연속성이 차단되는 구조를 보임은 시조의 3장 구조처럼 앞의 두 구가 시상(詩想)의 전개부로, 뒤의 한 구가 시상의 집약부이자 완결부로 기능함을 의미하며, 이는 작품의 이야기성(서사성)을 차단하는 구조로 작용하여 행의 수준에서도 서술의 억제에 의한 서정성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각각의 행을 통해 의미를 표현하고자 할 때 사실에 바탕을 둔 서술내용 중심만이 아니라 그 서술내용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의미 해석까지 함께 표현하려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어 제시된 서술내용의 해석적 의미를 매 행마다 부여하는 행의 구조적 완결성은 이야기의 진행을 행 이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서술의 차단성을 보인다.
「용비어천가」의 장(연에 해당) 구조는 작품 전체를 이끌어 내는 서두부로서의 수장(首章)인 제1장과, 작품 전체의 총결부로서의 졸장(卒章)인 제125장을 제외하고, 본사 전체가 앞 1행과 뒷 절 1행의 병치로 짜여진 2행연시(二行聯詩)로 되어 있다. 이는 대부분 앞 절에서 중국의 사적을, 뒷 절에서 그에 상응하는 조선왕조의 사적을 담아 내면서 그러한 의미 내용을 정사대(正事對)의 대구적(對句的) 표현장치로 담아내기에 적절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즉, 중국 제왕들의 영웅적 행적과 육조(六祖)의 영웅적 행적을 앞 뒤 행으로 짝 지우면서(事對) 다른 내용의 행적을 가지고 동일한 서술 의미를 갖도록 대응시켜 나가는(正對) 대구형식의 기법을 써서 두 행의 서술 의미를 일치시킨다.
이러한 동일한 의미구조의 반복은 율격구조와 통사적 성격에서까지 동일화를 꾀함으로써 두 행의 병치서술을 완벽한 경지까지 나아가도록 한다. 특히 제17∼109장까지의 모든 연(장)은 율격행의 수에서부터 각 율격이 지닌 보격형태와 음절수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율격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동질적인 두 행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통사론적으로도 두 행의 구조는 완전히 일치하여 서로 짝을 이루는 통사단위나 기능이 동일한 것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는 중국사적을 전범(典範)으로 앞에다 놓고 철저한 대구 형식으로 짜 맞추어 나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육조의 위대성에 객관적 설득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적 서술방법으로 이해된다.
또한 「용비어천가」에 배열된 삽화들의 배열원리를 보면 인접 삽화와의 서사적 인과관계를 맺지 못하는 단순한 열거 현상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제시된 것은 오직 삽화를 구성하는 여러 모티프들로부터 선택된 한 두 개의 특정한 모티프뿐이다. 모티프의 선택기준을 사건의 서사적 인과성 즉 서사내용에 두지 않고 그것의 서술의미에 두기 때문에 모티프 배열도 인접 모티프와의 사이에 서사적 인과관계나 시간적 맥락이 발견되지 않는 방식을 보인다.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국문시가로서, 「동명왕편(東明王篇)」 같은 신화를 노래한 숭고성을 이어받고 「제왕운기(帝王韻紀)」나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등 영사시(詠史詩)의 전통을 이은, 그리고 악장의 독자적 형식을 개척한 첫 작품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