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경 ()

오주연문장전산고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규장각검서관을 역임하였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 『오주서종박물고변』, 『백운필』 등을 저술하며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에 영향을 준 학자.
이칭
백규(伯揆)
오주(五洲), 소운거사(嘯雲居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8년(정조 12)
사망 연도
1856년(철종 7)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주요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
정의
조선 후기에, 규장각검서관을 역임하였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 『오주서종박물고변』, 『백운필』 등을 저술하며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에 영향을 준 학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士). 할아버지는 주부 이덕무(李德懋)이며, 아버지는 이광규(李光葵)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규경의 학문은 선대에 연원을 두고 있다. 할아버지는 박학다재하여 고금의 제자백가와 기문이서(奇文異書)에까지 통달했고, 문장도 새로운 풍을 일으켜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곡진히 그려내었다.

일찍이 정조가 규장각을 열고 명사(名士)를 검서관에 등용할 때 유득공(柳得恭) · 박제가(朴齊家) ·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이른바 ‘4검서(檢書)’라 일컬어졌다. 특히, 정조의 권우(眷遇: 임금이 신하를 특별히 사랑해 후하게 대우함.)를 받아 규장각에 편서(編書)의 일이 있을 때마다 참여하였다.

또한, 일찍이 심염조(沈念祖)의 사행을 따라 연경에 가서 유환(遊宦)하는 소인묵객(騷人墨客: 시문과 서화를 일삼는 사람)과 종유(從遊)하고, 때로는 외출해 산천 · 도리 · 궁실(宮室) · 누대(樓臺)로부터 초목 · 곤충 · 조수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적어와 귀국해 명성이 더욱 높았다.

아버지 이광규도 할아버지를 이어 검서관에 등용되어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일하였다. 이규경은 이러한 가풍 위에 당시 팽배하던 청조 실학(實學)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해 천문 · 역수(曆數) · 종족 · 역사 · 지리 · 문학 · 음운(音韻) · 종교 · 서화 · 풍속 · 야금(冶金) · 병사(兵事) · 초목 · 어조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考訂辨證: 옛 서적의 진위와 異同을 조사해 밝히고,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연구함.)해 1,400여 항목을 담아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을 집대성하였다.

주요 내용을 보면, 「인체내외치상변증설(人體內外置象辨證說)」에서는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논하였다. 여기의 의학 지식은 서양 고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서양 의술에 관한 내용을 최초로 기록한 저술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관념론에 사로잡혀 인체 내부는 물론 이목구비의 구조를 그려낸다는 것조차도 인성(人性)에 대한 야만적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두변증설(種痘辨證說)」은 1854년(철종 5) 평안도 지방에서 종두를 처음 실시했다는 내용이다.

한편,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 문제에 대해 당시 사리사욕에 찬 탐관(貪官)과 부상(富商)들이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자행하자, 이러한 도고행위(都賈行爲)를 비판하면서 매점매석을 적극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화폐가 비농민층만 편리하고 농민에게는 유해함을 들어 이익(李瀷)의 폐전책(廢錢策)을 지지하였다.

대외적인 상행위에 있어서도 개시(開市)와 교역의 필요성을 강조, 1832년 영국 상선이 우리나라에 교역을 요구해왔을 때 개시를 특허하고, 조약도 엄중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외에 『백운필(白雲筆)』을 지어 농정에 관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攷辨)』에서는 동서고금의 사물에 폭넓게 통할 수 있도록 신지식을 제시해 혁신적인 신기운을 조성하였다. 이규경의 이러한 지식과 혁신 사상은 초기의 개화 선각 인사들에게는 진지하고 절실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규경은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이룩한 실학을 계승, 조선 후기 실학을 꽃피운 박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오주연문장전산고』 · 『오주서종박물고변』 · 『백운필』 등이 있다.

이철교(李敎哲)는 본명은 이교영(李敎永)이었고, 충북에서는 이춘삼(李春三), 경북에서는 이용담(李龍潭)이라고 불렸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攷辨)』
『백운필(白雲筆)』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오주 이규경의 생애 연구」(박상영·안상우, 『민족문화』31, 2008)
「19세기 중엽 이규경의 학풍과 사상」(윤병주, 『한국학보』75, 1994)
「이규경의 실학에 있어서의 전통사상」(윤사순, 『아세아연구』50, 1973)
「이규경과 그의 전물학」(전상운, 『성신여대논문집』4·5, 1972)
집필자
유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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