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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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와제(瓦製) 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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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와제(瓦製) 토우.
내용

장식기와의 하나로서, 이를 만드는 사람을 잡상장(雜像匠)이라 한다.

≪조선도교사 朝鮮道敎史≫에 의하면,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神像)을 일러 잡상이라 하는데 이는 소설 ≪서유기 西遊記≫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土神)을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煞)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의하면, 신임관(新任官)이 선임관들에게 첫인사[免新許參]할 때 반드시 대궐문루 위의 이 10신상 이름을 단숨에 10번 외워 보여야 받아들여진다[許參]고 하면서, ① 대당사부(大唐師傅), ② 손행자(孫行者), ③ 저팔계(猪八戒), ④ 사화상(沙和尙), ⑤ 마화상(麻和尙), ⑥ 삼살보살(三煞菩薩), ⑦ 이구룡(二口龍), ⑧ 천산갑(穿山甲), ⑨ 이귀박(二鬼朴), ⑩ 나토두(羅土頭)의 상을 적고 있다.

곧, 여기에서의 대당사부는 삼장법사 현장(玄奘)이고, 손행자는 손오공(孫悟空), 사화상은 사오정(沙悟淨) 들로, 바로 ≪서유기≫의 등장자 또는 중국 토신의 이름들이다. ≪전율통보 典律通補≫에도 지붕 위에 손행자 등의 귀물(鬼物)을 만들어놓는다고 적고 있다.

이들이 잡상으로서 기와지붕 위에 놓이게 됨은 ≪서유기≫에 나오다시피, 당나라 태종의 꿈속에 밤마다 나타나는 귀신이 기와를 던지며 괴롭히자 문관·무관을 내세워 전문(殿門)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며, 아울러 불법 홍보 등의 방편에서 당나라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채택한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잡상은 우리의 ≪궁궐의궤≫에도 잡상·용상(龍像, 昌慶宮營建都監儀軌, 1834)의 이름으로 나오면서, 설계입면도[間架圖]에는 매우 간략히 그려지고만 있어 그 형상 하나하나를 바로 알 수는 없다.

잡상으로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을 중국의 오늘날 자료에서는 보지 못하였고 다만, 가장 앞쪽의 말을 탄 도인상(道人像)을 선인상(仙人像)이라 하고 뒤에 오는 그 밖의 상들을 주수(走獸) 또는 수수(垂獸)·평수(平獸) 등으로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선인상 외에 주수상 10상이 나타나 있는데, ① 용(龍), ② 봉(鳳), ③ 사자(獅子), ④ 기린(麒麟), ⑤ 천마(天馬), ⑥ 해마(海馬), ⑦ 고기[魚], ⑧ 해치[獬], ⑨ 후(吼), ⑩ 원숭이[猴] 상으로 선인상과 합하면 11상이 된다.

선인상은 닭(봉)을 탄 듯한 도인이나, 어떤 곳은 그냥 도인만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가장 뒤에 있는 손오공상은 짐승(馬)을 타고 있으면서 창수(戧獸)라 불려지고도 있다. 일본에는 잡상이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 19세기 이후 것만 실자료로 남아 있는데, 선인상 또는 대당사부 현장상이 아예 없으며 손오공상이 가장 앞에 놓여 있다. 또, 중국에는 궁궐·문루·관아·능사(陵祠)·사찰의 지붕 위에 모두 잡상이 보이나 우리 나라 사찰 지붕에는 그 예가 없어 주목된다.

중국에 보이는 잡상 자료는 요대(遼代) 9세기말부터로 여겨지고 있으며 명·청대에 유행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고려부터로 여겨지는데, 고려 말의 <관경변상도 觀經變相圖>의 서품(日本 大恩寺 및 西福寺 소장) 등에 세부는 불분명하나 웅크리고 앉은 2, 3개의 잡상이 궁전지붕에 그려진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영건의궤≫들에 의하면 경희궁·창경궁·창덕궁에 각각 112·168·148개의 잡상을 한번에 들여왔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단위는 개(箇, 介)로 적고 있다.

남아 있는 실자료를 보면 숭례문(崇禮門, 1448)은 9개,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17세기)은 5개,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17세기)은 7개, 수원 팔달문(八達門, 1796)은 4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1804)은 9개,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1867)는 11개,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 1865)은 5개,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1906)은 10개여서 지붕 한쪽에 올려놓은 수가 4∼11개로 제각기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정리가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모두 큼직한 손오공상이 앞에 앉아 있고 그 뒤로 사자·해치·봉 같은 무리들이 줄지어 있어 ≪서유기≫ 속의 내용만으로 모두 되어 있지는 않다. 시대적인 차이에서 그러한지 모르나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회루의 잡상을 보기로 살펴보면, ① 손오공, ② 모자 쓴 짐승(瑞獸), ③ 사자, ④ 해치, ⑤ 짐승(瑞獸), ⑥ 용(龍), ⑦ 해치, ⑧ 봉(鳳), ⑨ ⑤와 같은 짐승, ⑩ 해치, ⑪ ⑤와 같은 짐승의 순이다. 같은 짐승이 여러 번 쓰여졌으며, ⑦의 해치는 뒤로 돌아앉아 있기까지 하는 등 교란되고 무질서함을 보여 주고 있다.

손오공상은 높이 40㎝쯤이며, 그 밖의 상들은 28∼32㎝ 사이의 크기로 모두 네모난 낮은 받침[臺座]과 함께 만들어진 연질제(軟質製)의 웅크리고 앉은 자세들이다. 비교적 섬세하게 만든 좌우 두 쪽으로 된 틀을 써서 찍어내어 서로 붙인 자국도 보이고 있어, 언제부터 대량생산되고 작업화되었는지를 알려 준다.

손오공상을 살펴보면 타원형 챙이 돌려진 모자를 쓰고서 두 다리가 벌어지게 앉았으며, 두 팔은 내밀어 무릎 위에 얹고 있다.

미늘을 나타낸 두툼한 갑옷차림에 코는 크고 넓적하며, 둥글고 튀어나온 큰 눈은 ≪서유기≫에 나타난 이른바 화안금정(火眼金睛)의 꼴이며, 모자와 갑옷은 용왕에게 빼앗은 자(紫)금관, 황금갑옷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도불행사사상잡유(道佛行事思想雜糅) 기이(其二)』(이능화 집술, 이종은 역주, 『조선도교사』, 보성문화사, 1985)
「조선후기궁궐건축의 영조에 관한 연구」(김왕직, 한양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7)
『중국건축개설』(중국건축사편집위원회 편, 양금석 역, 태림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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