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분육등법은 조선시대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수세의 단위로 편성한 기준이다. 고려의 전시과체제에서는 농경지 휴한의 빈도를 기준으로 전품을 3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연작농법이 보급되면서 각등 전지의 모든 결·부에 대하여 조세를 동일하게 거두는 방식으로 법제화되었다. 모순과 폐단이 드러나면서 1444년 새로운 전세제도인 공법수세제(貢法收稅制)를 정립하였다. 6등전품제로 바꾸면서 양전척을 수지척에서 주척으로 바꾸는 등 변화가 뒤따랐다. 동시에 제정된 연분구등법과 함께 조선의 전세제도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운용되었다.
1444년(세종 26)에 새로운 전세제도(田稅制度)로 확정된 공법수세제(貢法收稅制)는 전품(田品)을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각 등급에 따라 전지의 결(結) · 부(負)의 실적에 차등을 두는 수세 단위로 편성하였다. 고려의 전시과체제에서는 농경지 휴한(休閑)의 빈도를 기준으로 하여 전품을 상 · 중 · 하 3등급으로 나누어 각 기의 세(稅)를 달리하였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휴한농법이 많이 지양되고 연작농법(連作農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첫째 전품을 등제(等第)하는 기준을 비(肥) · 척(瘠)의 정도로 바꾸었으며, 둘째 이와 관련하여 상 · 중 · 하의 전지는 각기 전품에 따라 양전척(量田尺)을 달리하는 수등이척(隨等異尺)의 제도로 바뀌었고, 셋째 그 대신에 각등 전지의 모든 결 · 부에 대하여 조세를 동일하게 하는 동과수조(同科收租)의 방식으로 변천하였다. 그리고 이는 고려 말기에 제정된 과전법에서 정식으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이 법제는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어서 조선 초기의 수조제(收租制) 전체의 운용 과정에서 점차 그 불합리한 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첫째, 결 · 부의 수를 산출하는 양전척의 기준이 농부의 손가락 마디 폭의 너비, 즉 수지척(手指尺)을 근거로 하는 조잡한 것이었다. 둘째, 이때의 3등전품제(三等田品制)에서는 전국 전지의 절대 다수를 하등전으로 책정한 바탕에다 동과수조법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토지생산력의 실제에 상응하는 수세제가 운영될 수 없었다.
셋째, 전품의 분등(分等)이 각 도(道) 단위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 일률의 통일성을 기할 수가 없었다. 넷째, 종래의 양전(量田)에서는 각 전품의 전지가 그 한쪽의 장단은 전품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차등이 있었지만, 그 평방치인 실적의 차이는 비례적인 차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이상은 여말선초의 3등 전품제 양전상에 나타난 치명적인 결함인데, 이는 수조제의 다른 여러 가지 폐단과 함께 전품과 연분(年分) 파악방식의 대개혁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었다. 그 개혁은 1444년의 새로운 전세제도인 공법수세제로 정립되어 항구화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이전의 상 · 중 · 하 3등전품제를 고쳐서 1·2·3·4·5·6의 6등전품제, 즉 전분육등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분육등법은 그 위에 여러 가지 변화를 포함하였다.
첫째, 양전척의 근거 척도를 이전의 수지척에서 주척(周尺)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1등전의 양전척은 주척으로 4.775척, 2등전은 5.179척, 3등전은 5.703척, 4등전은 6.434척, 5등전은 7.55척, 6등전은 9.55척이며, 각등전은 이것의 1척 평방이 1파(把),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00부가 1결(結)이 되는 것이었다.
둘째, 각 등전 1결을 척관법(尺貫法)으로 환산하면 1등전은 2,753.1평, 2등전은 3,246.7평, 3등전은 3,931.9평, 4등전은 4,723.5평, 5등전은 6,897.3평, 6등전은 1만1035.5평이 되는 것으로 책정했는데, 이는 당시의 토지생산력에 상대적으로 보다 접근한 지적(地積)이었다.
셋째, 이전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하등전을 6등전품의 1·2·3등전으로 많이 편입시켰고, 또 이전의 산전(山田)을 상대적으로 축소된 결적(結積)의 5·6등전으로 편입시킴에 따라 전체적으로 1결의 실적은 축소되는 반면 전국의 결총(結總)은 크게 증대되었다.
그런데 세종 때 제정된 공법수세제의 원리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타당성을 크게 갖춘 법제였지만 시행 과정에서는 그러한 원리가 그대로 지켜지지 못하였다. 전품의 분등은 의연 각 지역별로 난립되어 갔으며, 따라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양전 자체도 결코 객관적인 실정에 상응하는 결부수를 산출해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전분육등법은 동시에 제정된 연분구등법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규정되어 조선왕조 일대의 전세제도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운용되었다. 다만, 진작부터 모든 전지의 양전척을 1등전척으로 통일하여 양전하고, 각 등 전지의 결부수는 환산표에 따라 산출하는 방식으로 기술상의 변천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시기는 아마도 세조(世祖) 때였을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