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김제군수, 서흥부사,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대수(大受)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75년(성종 6)
사망 연도
1552년(명종 7)
본관
초계(草溪)
주요 관직
성균관사성
정의
조선 전기에, 김제군수, 서흥부사,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대수(大受). 정사중(鄭師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옥량(鄭玉良)이고, 아버지는 생원 정희길(鄭熙吉)이며, 어머니는 김유경(金惟慶)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품이 정직하고 심지가 깊었다. 학문을 깊이 연마하였으나, 연산군의 횡포에 반대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사림에게 기회가 부여되면서 1519년(중종 14)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호조좌랑·형조좌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옮겨 고성군수·김제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가 몰려나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면서 그에게도 핍박이 가하여져, 1535년 사간원에 의하여 탐폭하고 비리가 많다고 탄핵되어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무고였던 것 같다.

군민들이 그의 파직을 애석해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 뒤 그의 억울함이 밝혀져 다시 복직되었는데, 외직으로 청송부사·서흥부사를 지내고, 내직으로 옮겨 1548년(명종 3)에는 73세로 성균관사성에 이르렀다. 그 뒤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초계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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