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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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초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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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초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교육.
내용

우리 나라에서는 중등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중학교 교육과 고등보통교육 및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고등학교 교육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교교육의 체계가 초등교육기관에서 고등교육기관으로 순서에 따라 발달한 것은 아니다.

초등교육기관은 근대국가의 성립과 함께 사회적인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의무교육적 성격으로 일반화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고등교육기관은 전통시대부터 상류 지배층을 중심으로 지배와 권력을 유지하고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지도자 양성기관으로 설치되어 왔다.

이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일부, 또는 그에 접속하는 예비학교가 대체로 중등교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등교육은 역사적·전통적으로 각국의 실정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주로 대학에 접속하는 단계의 중등교육이냐, 초등학교에서 접속되는 단계로서의 중등교육이냐에 따라 그 차이가 생기게 된다.

대학에 접속하는 중등교육은 대학의 준비교육을 목표로 하며, 내용적으로는 일반 교양교육을 위주로 한다. 이에 대하여 초등교육에서 접속되는 단계로서의 중등교육은 인간으로서의 완성 교육을 목표로 하며, 내용적으로는 초등보통교육이 중등·고등 보통교육으로 발전된다. 또한 보통교육에서 직업교육·전문교육으로 분화하게 됨으로써, 직업에 대한 기초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기능을 닦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중등교육은 사회적으로는 만인에게 개방되며 전통적 중등교육에 대한 민주적 중등교육의 단계로 발전하게 됨을 특징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중등교육은 전자에 속하며, 미국이나 사회주의국가의 중등교육은 후자에 속한다.

우리 나라의 중등교육은 고대에서부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광복 전까지의 중등교육이 대체로 전자에 속하며, 광복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중등교육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 전통시대

우리 나라의 중등교육은 고구려의 경당(扃堂)이나 통일신라의 화랑도교육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려 때에는 중앙의 관학인 동서학당(東西學堂)과 5부학당(五部學堂), 지방의 교육기관인 향교(鄕校)를 비롯하여 사학으로는 12도(十二徒)·7재(七齋) 등이 있었다.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동서에 두 학교로 설치된 동서학당은 고려 말 공양왕 때 동·서·남·북·중앙의 5부학당으로 확충되었으며, 지방의 향교와 같은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다만 당시의 학당과 학교가 다른 점은, 향교가 문묘(文廟)를 설치하여 성현(聖賢)들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등 배향(配享)의 기능을 갖춘 데 비하여 학당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만 담당했다는 점이다.

12도는 최충(崔沖)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가 교육적 성과를 크게 올리자, 이밖에 저명한 유학자들이 각기 문도를 모아 12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12도의 교육내용은 당시 고등교육기관인 국자감의 교육 수준과 비슷하였으며, 고려의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비교적 초·중·고등교육기관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의 최고학부인 국립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이 고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초등교육은 전국의 마을마다 자유롭게 설립, 운영된 서당(書堂)에서 담당하였다. 이 시기의 중등교육은 중앙의 관학인 사학(四學)과 지방의 관학인 향교, 지방의 사학(私學)인 서원(書院)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동학·서학·남학·중학으로 이루어진 사학은 고려 때의 학당을 계승, 발전한 것으로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었다. 규모는 성균관보다 작고 문묘를 두지 않았으나 교육내용이나 방법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4개의 각 학당에 교수 2명과 훈도 2명이 수업을 담당하였고, 학생 정원은 100명이었으며, 예조에서 매월 시험을 실시하여 성적을 평가하였다.

향교는 지방 재정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중앙정부에서 ≪경국대전≫에 기록된 ‘학교규제’로 그 제도와 조직 등을 규정하였다. 설립목적은 성현에 대한 향사(享祀:제사)와 지방 유생에 대한 교육에 있었으며, 이와 함께 지방 문화의 향상과 풍토 진작 등 사회교육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학생 정원은 소재지에 따라 30∼90명이었는데, 교수·훈도 등의 수와 직종도 그 규모와 대소에 따라 배치되었다.

교육내용은 주로 ≪소학≫과 사서오경 등이었고, ≪근사록≫, 제사(諸史), ≪삼강행실≫ 등도 가르쳤다. 이 밖에 농업과 잠업에 관한 서적도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약간의 실업교육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은 지방의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학전(學田)·서적 등을 하사하는 일이 많았다. 향교의 학생들은 감사(監査)가 주재하는 도 단위의 강술(講術:학예 또는 책의 내용을 차례대로 밝혀 말하는 것)과 제술(製術:시나 글을 짓는 것)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자는 성균관에서 실시되는 복시(覆試)에 응시함으로써 생원이나 진사가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도(道)의 장(長)인 감사가 감독 책임을 맡고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으로 보면 공립학교의 성격을 띤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다.

관학인 사학과 향교에 대하여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향교와 유사한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향교가 문묘 배향을 실시한 데 비하여 서원은 명유(名儒)·공신(功臣)을 제향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서원은 한적한 산야에 자리잡고 있어 학문을 닦고 심신을 수양하기에 적합했으며, 관령(官令)이나 학칙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면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서원은 지방의 교육 진흥과 학문 진작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나라에서도 국왕이 사액(賜額)하는 등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러나 설립 초기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어 파벌을 조장하고 당쟁을 격화하는 등의 폐해가 심해져,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에 의해 47개의 서원만을 제외한 700여 개의 서원은 모두 철폐되었다.

(2) 근대의 중등교육

근대적 의미의 중등교육기관은 신교육의 도입기인 1880년대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중등교육은 고등교육기관과 구분하기 어려운 형태로 발족되었으며, 설립 주체에 따라 기독교계 사학, 민간인 사학, 관학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기독교계 사학으로는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培材學堂), 1886년의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이화학당(梨花學堂)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민간인이 설립한 중등학교로는 1883년에 덕원부사 정현석(鄭顯奭)과 덕원읍민이 설립한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선두로, 흥화학교(興化學校)·양정학교(養正學校)·휘문의숙(徽文義塾)·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한편, 학제상의 중등교육과 이에 따른 관립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895년부터 1904년에 이르기까지 중학교·사범학교·의학교·농상공학교·외국어학교 등 각종 중등교육 정도의 교육기관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1895년에 한성사범학교·외국어학교·법관양성소, 1899년에 경성의학교, 1900년에 한성중학교, 1914년에 농상공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기의 중등교육은 고등교육과 구별하기가 모호하기 때문에, 현행 학제에 비추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899년 4월에 공포된 <중학교관제>에서는, 중학교를 ‘실업에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정덕(正德), 이용 및 후생의 도를 가르치고 중등교육의 보급을 도모’하는 교육기관으로 규정하였다.

수업연한은 심상과 4년과 고등과 3년의 7년으로 규정하였는데, 실제로는 고등과를 설치한 경우가 없었다. 심상과의 학과는 윤리·독서·작문·역사·지리·산술·경제·박물·물리·화학·도화·외국어·체조 등으로 하였다.

1906년에는 <고등학교령>을 공포하여 이전의 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개편하고, 본과 4년 외에 수업연한 1년 이내의 예과 및 보습과를 둘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여자의 중등교육을 위한 <고등여학교령>이 1908년에 처음으로 공포되어, 신교육이 도입된 이후 최초로 여성교육에 관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1908년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으나, 1909년까지 설립된 고등여학교는 9개에 불과하였다.

고등여학교의 목적은 ‘여자에게 필수적으로 소요되는 고등보통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수업연한 3년의 본과와 2년 이내의 예과나 기예과(技藝科)를 둘 수 있게 하였다.

이어 1909년에는 <실업학교령>을 공포하였다. 실업학교는 농업학교·상업학교·공업학교로 나누고,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되 지방의 실정에 따라 1년을 단축 또는 연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각종 실업에 종사하려는 자에 대하여 적절한 교육을 베푸는 데 그 목적이 있으므로,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지방 산업의 현상과 장래의 취향에 비추어 적당히 경영해야 할 것을 규정하였다.

한말에는 개화와 구국의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적 중등교육이 발족되었으나,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교육은 물론 중등교육까지 크게 억제되었다. 1910년 국권 상실 후 일제는 이듬해에 <조선교육령>을 공포, 이전의 고등학교와 고등여학교를 각각 4년제 고등보통학교 및 3년제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실업학교에 관해서는 기존의 농·공·상업학교 외에 간이실업학교를 두게 해, 이른바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이라 하여 정책적으로 실업교육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실업교육은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치중하여, 고등보통학교에서는 농업 또는 상업의 실무과와 수공과를 필수과로 정하고,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가사·재봉 및 수예를 필수과로 하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완화된 듯한 조처를 취하였다. 1922년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고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5년, 여자고등보통학교는 4년으로 연장하고, 이들 학교에 대한 실업과 편중된 교육내용을 조정하였다. 실업학교는 수업연한을 3∼5년으로 연장하고 수산학교·직업학교 등 그 유형을 다양화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의 전시체제하에서 일제는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의 명칭을 각각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로 개칭하였고, 1943년 다시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모든 교육을 전시체제에 맞도록 개편하였다.

한편, 1935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고등보통학교는 26개 학교이고 학생수는 1만 4000여 명이었으며, 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개 학교에 학생수 6,000여 명, 실업학교는 60개 학교에 학생수 1만 2000여 명, 실업보습학교는 94개 학교에 학생수 4,000여 명으로 되어 있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 이 숫자는 약간 늘어나기는 했지만, 당시의 인구가 약 2,000만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중등교육이 얼마나 미약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교육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광복 당시 남한에는 165개의 중등학교가 있었으며, 학생수는 8만 3514명이었다. 광복과 함께 국민의 교육열은 한꺼번에 폭발하여 중등교육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3년제 중학교 및 6년제 고등중학교로 학제를 개편했다가, 1949년 12월 <교육법> 제정 및 1951년의 동법 개정을 거쳐 현행 교육제도와 같은 6·3·3·4제가 마련되어 각 3년제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밖에 근로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한 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고등공민학교 등이 중등교육의 일환으로 발족되었다.

1955년에는 중학교 949개 학교, 고등학교 578개 학교로 증가되었다. 1960년 이후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증가 상황을 살펴보면, 1997년 3월 현재 중학교는 2,720개 학교에 재학생 218만 283명이고, 고등학교는 일반계와 실업계를 합해서 1,892개 학교에 355만 6971명이다. 광복 당시의 165개 학교에 학생수 8만 3514명과 비교하면 학생수는 68.6배의 놀라운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다.

1997년 현재 우리 나라의 중등교육기관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일반계 및 실업계)를 비롯하여 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고등공민학교·방송통신고등학교·특수학교·각종학교 등이 있다.

한편, 초등학교 졸업생의 중학교 진학률은 1973년까지만 해도 70.3%였으나 1979년에 91%, 의무교육을 연장해서 시행한 후인 1986년에는 99% 이상으로 증가하여 거의 전원이 중학교 교육을 받게 되었다.

또한 중학교 졸업자의 고등학교 진학률도 1997년 현재 99.4%에 달했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청소년들을 위한 중등교육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또, 근로청소년을 위한 방계 중등교육기관의 다양화 등으로 거의 모든 청소년에게 중등교육이 완전히 보편화·일반화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은 앞으로 더욱 촉진될 전망이다.

이와 같이 중등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충되고 점진적인 의무교육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해결되어야 할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 이들 문제점을 중심으로 앞으로 남은 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70년대 이후 중학교의 대형화와 과밀학급 현상이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1985년의 통계에 따르면 31학급 이상의 대규모 학교가 전체 학교의 20%, 61명 이상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는 학급 수가 전체 학급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정상적인 교육 및 질적 향상을 기하기 어려우며, 더욱이 무시험 진학으로 이질적인 학습집단이 형성되어 학습지도와 생활지도면에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과대 규모의 학교와 과밀학급의 해소는 중학교 교육행정의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② 고등학교의 경우는 수월성 추구, 사학의 자율성 신장, 교육 재정의 효율화, 입시제도에 대한 기본방향의 정립 등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사립학교의 경우에는 그 건학이념과 설립배경, 재정운영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이 두드러진 반면 정부의 재정 지원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공·사립 간의 불균형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학에 대한 자율성 보장과 정부의 재정 지원 증가 등에 대한 정책의 재검토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③ 중등학교 수준의 각종 실업계 고등학교의 문제는, 정책적으로는 실업교육 또는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이 중점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나,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효과적인 교육행정 및 제반 여건의 부족으로 바람직한 실업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진학 및 취업에도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특히 취업문제는 기업체를 포함한 사회와 정부가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④ 그 밖에 중등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대학입시제도의 평가와 검토, 영재교육의 신장 및 발전, 학원 자율화에 따른 학생지도, 대학입시 준비를 위한 과외 조절 등 여러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또한 전기 중등교육과 후기 중등교육은 그 성격에서 점차 차이가 뚜렷해지고 있으며, 후기 중등교육의 분화와 다양화가 더욱 요청될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문헌

『중등교육의 제문제』(한국교육학회, 능력개발사, 1974)
『한국교육삼십년』(문교부, 1980)
『한국중등교육35년사』(중등교육협의회, 1980)
『한국교육연감』(대한교육연합회, 1985)
『교육통계연보』(교육부, 1997)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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