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는 일제강점기 『우리말본』, 『한글갈』, 『조선민족 갱생의 도』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자 국어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했다. 1937년 주시경 이래의 한글 문법연구를 계승·발전시켜 집대성한 『우리말본』을 펴냈고, 1941년에는 한글 연구의 이론과 역사를 집대성한 『한글갈』을 펴냈다. 한글전용과 풀어쓰기 이론을 발표했고 국어정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어 찌꺼기를 몰아내는 우리말도로찾기운동도 전개했다.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에 의해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호는 외솔. 경상남도 울산(현 울산광역시)출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고향의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10년 상경하여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 뒤에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됨.)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그 해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문과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고, 1922년 4월에 일본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여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라는 논문으로 1925년 졸업, 계속하여 그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 1945년 광복까지 4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9월까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재직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 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일이 있다.
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 · 부회장을 맡았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와 그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밖에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 간 계속하여 한글학회를 이끌었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 부회장 · 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과 공로로 1955년 제1회학술원공로상, 1967년 5 · 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3월 사망하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국어학의 연구, 국어정책의 수립, 그리고 교육학의 연구와 국어운동의 추진에 전념하여 그와 관련한 20책에 이르는 저서와 100편에 이르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국어학의 연구는 1910년 봄, 일요일마다 보성중학교에서 열리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싹튼 것이라 한다.
이 분야의 업적은 『우리말본』과 『한글갈』로 집약된다. 『우리말본』은 1929년 『우리말본 첫째매 소리갈』에 이어 1937년 온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주시경 이래의 문법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전반적인 체계는 중학교 교재로 편찬된 『중등 조선말본』(1934)에 이미 나타나 있었으나, 이를 보완하고 확대하였는데 인용된 자료의 해박함, 설명의 논리정연함, 체계의 정연함에 있어서 당시로는 이것을 능가할 문법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글갈』(1941)은 한글 연구의 체계화를 추구한 업적인데, 역사편과 이론편으로 되어 있다. 역사편은 한글제정의 동기와 경위, 한글문헌에 대한 해설, 한글 연구의 역사를 다루고, 이론편은 한글창제 이후 없어진 글자를 주로 다루어서 그 음가를 추정한 것이다.
국어정책의 수립과 국어운동에 대한 집념과 활동도 대단하여 항상 최선봉에서 그 운동을 추진하고 그에 대한 이론투쟁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글자의 혁명』(1947), 『한글의 투쟁』(1958),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8), 『고희 기념 논문집』(1968), 『한글만 쓰기의 주장』(1970) 등 단행본으로 한글전용과 풀어쓰기의 이론을 발표하여, 이 운동의 이론적인 지침서가 되었다.
이 밖에 국어정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어의 찌꺼기를 몰아내는 등 우리말도로찾기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의 이론적인 근거는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1953)에 나타나 있다. 국어 정책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후 6년에 걸친 문교부 편수국장 재직중에 교과서에서 실행되었다.
이에 대한 시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현행 각종 교과서에서 한글만으로 가로쓰는 체재를 확립한 일은 그의 업적이다. 교육학적인 연구는 대학의 졸업논문에서 비롯되는데, 민족주의적인 국민 계몽사상을 고취한 『조선민족 갱생의 도』(1930)가 공개된 최초의 업적이다.
이 책에는 일생을 일관한 애국 · 애족의 사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먼저 우리 민족의 성격상의 결함과 질병을 진단하여 그 역사적인 원인을 구명하고서, 민족이 되살아날 원리를 말하고 이어 그 원리를 실천하고 노력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 확대, 발전되어 『나라 사랑의 길』(1958)과 『나라 건지는 교육』(1963)으로 간행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고취하여 부강한 자유국가와 훌륭한 자주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국어운동의 추진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점도 없지 않으나,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로서, 국어와 한글운동의 이론가이며 실천가로서, 민족의 중흥과 민주국가 건설을 외친 교육자로서 남긴 업적과 공로는 크다.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 그 의지는 민족사의 한 귀감이 된다.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를 중심한 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회가 1970년에 창립되어 기관지 『나라사랑』을 발간하며, 해마다 국학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