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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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할 때 입는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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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할 때 입는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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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는 ≪예기 禮記≫ 혼의(婚儀)에 의하면 두 성(性)이 즐겨 합하여 종묘를 모시고 후세를 잇고자 함이니 군자는 이를 중히 하라고 하였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에는 주희(朱熹)의 ≪가례 家禮≫를 근간으로 각종 의례에 대한 규범을 정하였으며,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만큼 궁중의 의례복과 민간의 의례복에는 차등이 있었다.

국왕과 왕세자, 왕세손과 같이 왕실의 혼례는 가례라 하여 그 명칭부터 달랐으며, 그 절차도 일반과 달리 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책비(冊妃)·친영(親迎)·동뢰(同牢)의 육례(六禮)로 진행되어 여러 달에 걸쳐 수천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치뤄졌다.

납채는 대궐에서 간택된 왕비 집에 청혼하러 사자(使者)를 보내는 의식인 납채의와 왕비 집의 역할을 하는 별궁에서 청혼을 받아들이는 수납채의로 진행된다. 납징은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징표로 대궐에서 사자로 하여금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의식인 납징의와 왕비 집에서 이 예물을 받는 수납징의로 진행된다.

고기는 대궐에서 길일(吉日)을 택하여 가례일로 정해 이것을 별궁에 알려주는 고기의와 왕비 집에서 이를 받는 수고기의로 진행된다. 책비는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의와 왕비 집에서 왕비로 책봉받는 수책비의로 진행된다.

친영은 왕이 왕비의 집 역할을 했던 별궁에 가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동뢰는 왕이 친영일 밤에 대궐로 맞아들인 왕비와 서로 절한 뒤에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루는 의식이다.

각 의례마다 상징적 의미가 다른 만큼 착용되는 복식을 달리하였는데, 이 때 착용되었던 각 복식을 왕·왕세자·왕세손, 비·빈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왕·왕세자·왕세손의 가례복

가례시에는 법복(法服)과 의대(衣襨)를 입는데, 의대란 궁중의 연거시(燕居時)에 착용하는 연복(燕服)에 대한 경어이다. 법복으로는 면복(冕服)·조복·상복을, 의대로는 편복을 입었다. 면복은 면류관과 곤복으로 이루어지며, 조복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로, 상복은 익선관과 곤룡포로 이루어졌다.

의대는 철릭(天益: 왕의 철릭 표기이며 신하들의 것은 帖裏로 표기 하였다.)·답호(褡護)·액주름[腋注音]·과두(裹肚)·삼아(衫兒)·바지(把持)·마미망건(馬尾網巾)·마미두면(馬尾頭冕) 등이 있다.

① 면복 : 왕이 혼례를 올리고 왕비를 책봉하여 맞아들이는 납비의(納妃儀)에서는 납채·고기·명사봉영·동뢰에 착용하며, 왕세자가 빈을 맞아들이는 왕세자납빈의(王世子納嬪儀)에서는 왕은 납채·임헌초계에, 왕세자는 임헌초계·동뢰에 면복을 착용한다.

또한 왕세손납빈의(王世孫納嬪儀)에서는 왕과 왕세자는 납채·임헌초계에, 왕세손은 임헌초계·동뢰에 면복을 착용한다. 왕의 면복은 구류면(九旒冕)·구장복(九章服), 왕세자는 팔류면·칠장복, 왕세손은 칠류면·오장복이었다.

② 원유관·강사포 : 납비의와 왕세자납빈의에 있어 왕이 납징·책비·책빈에 착용하였고, 왕세손납빈의에 있어서는 왕·왕세자가 납징·책빈에 이를 착용하였다. 왕은 8량(梁)의 원유관에 중단(中單) 깃에 불문(黻文)이 11개가 있는 강사포를 착용하였고, 왕세자는 7량의 원유관에 중단 깃에 불문이 9개가 있는 강사포를 착용하였다.

③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 납비의·왕세자납빈의·왕세손납빈의에서의 동뢰의식이 끝나면, 면복에서 이것으로 갈아입는다. 왕은 오조룡(五爪龍)을 금사로 수놓은 원보(圓補)를 좌우의 어깨와 앞뒤에 가식한 곤룡포를, 왕세자는 사조룡(四爪龍)을 금사로 수놓은 원보를 역시 좌우의 어깨와 앞뒤에 가식한 곤룡포를, 왕세손은 삼조룡(三爪龍)을 금사로 수놓은 방룡보(方龍補)를 앞뒤에만 가식한 곤룡포에 익선관을 착용하였다.

(2) 비·빈의 가례복

가례시의 법복으로는 적의(翟衣)를 입었으며, 의대로는 노의(露衣)·장삼(長衫) 등을 입었다.

① 적의 : 적의는 왕비를 상징하는 명복(命服)으로 , 가례 시 왕비와 왕세자빈이 책비의·책빈의·친영의·동뢰연에 착용하였다. 이 적의는 중국 송(宋)과 명(明)나라의 명부복인데, ≪고려사≫ 공민왕 때에 왕비관복으로 명나라로부터 적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 3년(1403)부터 인조 3년(1625)까지 총 14차례에 걸쳐 명으로부터 왕비관복의 사여를 받는데, 이 때는 적의제가 아닌 대삼제(大衫制)이지만, 적관(翟冠)이 포함되어 있어 적의 또는 치적의로 통칭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조조의 ≪국혼정례≫에 보면, 중국에 새로 등장한 청(淸)의 예제를 따르지 않고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의거한 명의 적의제를 따라 나름대로 적의를 제정하고 있다. 이는 국말까지 습용되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위로 오르면서 명 황후의 적의제를 적용하여 착용하게 된다.

가례 시 법복에는 적의에 별의(別衣)·내의(內衣)·폐슬(蔽膝)·대대(大帶)·수(綬)·하피(霞帔)·상전삼후사(裳前三後四)·수(繡)·면사(面紗)·적말(赤襪)·적석(赤舃)·흉배(胸背)를 착용하였다.

② 노의 : 태종 12년 6월 사헌부 상소문에 보면, 노의·오군·입모는 존자의 옷인데, 상고천녀(商賈賤女)도 입고 있어 존비를 가릴 수 없으니 4품 이상의 정처만 노의·오군에 입모를 쓰고, 5품 이하 정처는 장삼·오군에 입모를 쓰되 노의는 못 입게 한 것으로 보아 예복 중 상복(上服)임을 알 수 있다.

≪국혼정례≫에 대군부인·왕자부인·공주·옹주의 의복으로 대홍색 향직으로 만든 단노의(單露衣)가 있다. ≪가례도감의궤≫와 ≪국혼정례≫의 기록으로 보아 노의는 적의와 마찬가지로 뒤가 앞보다 길어 입으면 포의 뒤가 땅에 끌리게 되며, 대홍향직(大紅鄕職)을 사용하고, 원형의 금수(金繡)한 흉배와 소매 끝에 남색 한삼을 달고 여기에 자색라(紫色羅)로 된 노의대(露衣帶)를 띠었다.

③ 장삼 : 노의 다음가는 여자 예복으로, ≪사례편람 四禮便覽≫에 대의(大衣)·대수(大袖)·원삼(圓衫)·장삼이 대개 같은 옷으로 입혀졌음을 볼 수 있다.

≪국혼정례≫에 기록된 장삼은 대홍색으로 겹으로 되어 흉배를 달고 있으며 소매 끝에는 흰색 한삼이 달리고 대홍라의 띠를 매고 있다. ≪가례도감의궤≫에 보이는 장삼은 그 종류가 다양해서 흉배장삼·겹장삼·단장삼·세수장삼 등이 있다.

④ 원삼 : 역대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 의대에 원삼이 들어 있지 않고 왕세자빈과 세손빈의 의대에만 있으나 조선말기에는 노의·장삼·원삼 등 대수에 속하는 것이 원삼 한 가지로 집약되어 왕비도 입는 높은 옷이 되었다.

≪가례도감의궤≫에 보이는 원삼의 의차(衣次)로 보아 가례 시 왕세자비와 세손빈이 착용한 원삼은 모두 초록원삼임을 알 수 있는데, 대한제국 성립 후에는 세자비의 경우 황태자비로 승격하면서 홍원삼(紅圓衫)으로 바뀌었다.

≪상방정례≫에 의하면 빈궁은 초록원삼을 착용한데 반해 숙의(淑儀)의 가례시에는 아청색(鴉靑色) 원삼을 착용하게 하여 차등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국말의 궁중용 원삼으로 황색에 다홍과 남색 끝동, 흰 한삼을 달고 운룡문직금과 부금을 한 황후의 황원삼, 운봉문 직금을 한 비빈의 자적색이나 대홍색 원삼, 공주·옹주가 주로 입었다는 황문직금의 초록원삼이 문화재로 현존하고 있다. 궁중용 원삼에는 신분에 따라 용문·봉문·화문의 보와 흉배를 달았으며 대대를 매었다. 머리는 어여머리·떠구지머리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혼례는 주희의 ≪가례≫에 따라 의혼(議婚)·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의 육례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와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것이, 헌종 10년(1844) ≪사례편람≫이 편찬되면서부터는 의혼·납채·납폐(納幣)·친영 등으로 간소화되어 크게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

의혼이란 중매를 통해 신부집과 혼례에 관한 의사를 주고받는 단계이다. 남자는 16세로부터 30세 사이에, 여자는 14세로부터 20세 사이에 혼례를 의논한다.

혼인 역시 관례(冠禮)와 마찬가지로 혼인을 할 사람이나 주장하는 자에게 기년 이상의 상(喪)이 없어야 한다. 양가에서 합의한 후 신랑집에서 공식적으로 혼인을 청하는 예로 납채서를 보내는데 이 단계가 납채에 해당한다.

납폐 단계에서는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혼서와 채단을 함에 넣어 보낸다. 친영은 혼례의 핵심이 되는 단계이다.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들이는 것으로, 친영은 다시 몇 가지의 절차로 세분할 수 있다.

예서에서는 초례(醮禮)·초행(初行)·전안(奠雁)·교배(交拜)·합근(合卺)·현구고(見舅姑)·현가묘(見家廟)·서현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의 절차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재의 관행에서는 대체로 초행·납폐·전안·교배·합근·서현부지부모·우귀·현구고·현가묘의 절차로 하였다.

즉 초례가 행하여지지 않고, 납폐가 친영의 절차에 포함되며, 전안례를 끝낸 후 곧 신랑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신부집에서 계속 교배례와 합근례를 치루고 첫날밤을 지낸 다음에 우귀한다는 점에서 ≪예서≫의 기록들과 차이가 있다.

(1) 신랑복식

신랑의 예복으로는, 사모(紗帽)·단령(團領)·혁대(革帶)·흑화(黑靴) 등이 있다. 조선초기 만해도 유관자만이 사모와 품대(品帶)를 하고 직함이 없는 자는 입(笠)을 착용하고 조대(絛帶)를 띠었으나, 조선후기에는 혼례는 인륜의 대사라 하여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고 백관의 상복인 사모·단령을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초행에는 신랑집과 신부집이 거리 관계 또는 지방에 따라 신랑이 초례와 같은 성장(盛裝)을 하고 오기도 하며, 평복에 주의를 입고 와서 막차(幕次) 안에서 사모관대로 갈아입기도 하였다.

혼례식이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각기 방에 들어가는데 이 때 신랑은 “관대(冠帶)벗김”이라 하여 사모관대를 벗기고, 복건에 초립을 씌우고 청도포(靑道袍)를 입히는 등 신부집에서 만든 옷으로 갈아 입힌다.

① 사모 : 사모는 관리의 관모이나 혼례에 한해 신랑복식으로 허용되었다. ≪광례람 廣禮覽≫에는 혼례제구(婚禮諸具)로 사모와 함께 이엄(耳掩)과 서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개화기의 사진에도 풍차 등의 방한모나 복건 위에 사모를 착용한 경우를 볼 수 있다.

② 단령 : 옷깃의 모양이 둥글어 단령이라 하며 유관자(有冠者)의 상복(常服)이었는데, 혼례 때만은 인륜의 대사라 하여 반상을 가리지 않고 이를 착용할 수 있었다. 신랑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대개 청색 단령에 문관 당하관의 단학(單鶴) 흉배를 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의 사진을 보면 일정하지는 않았다.

한편 고종 21년(1884) 윤 5월에 관복에 흑단령만을 입게 하고 당상관은 유문흑사(有紋黑紗), 당하관에는 무문흑사(無紋黑紗)로 하게 하였고, 고종 31년 11월 갑오경장 시에는 흑단령을 대례복으로, 광무 3년(1899) 8월에는 단령포의 소매를 좁게 하고 여기에 흉배를 달면 대례복으로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국말의 신랑 혼례복 중에는 좁은 소매의 흑단령도 발견된다.

그러나 1900년에 편찬된 ≪증보사례편람≫에서는 “초취에는 홍단령, 재삼취에는 흑단령을 입고 관대를 한다.”라 하여, 초·재혼 여부에 따라 단령의 색을 구분하는 경우도 보인다.

③ 혁대 : 직품을 나타내므로 품대, 그리고 그 재료로 인해 혁대, 각대라고도 불렀다. ≪광례람≫과 ≪여유당전서≫에는 혼례 시 신랑의 대는 일품과 같은 서대를 띤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뒤에 가난한 선비집에서 다 이를 어찌 갖추겠느냐는 구절로 보아, 흑각대를 띠는 경우도 있었다고 본다.

④ 목화(木靴) : 신은 당상관 협금화로 되어 있었으나 목화를 신는 것이 준례로 되어 있어, 신랑의 사모·단령에는 목화를 신었다.

⑤ 편복포(便服袍)류 : 단령 속에는 편복포 종류를 입는다. 창의(氅衣)·중치막 또는 도포 등 편복포 중에 한 가지를 밑에 껴입었으며, 혼례시의 도포는 흰색이 아니라 청색으로 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소매 넓은 포의 착용이 금지되자 두루마기[周衣]를 단령 밑에 착용하였다.

⑥ 바지·저고리 : 편복 포 속에는 바지·저고리를 입었으며 그 속에 적삼과 고의를 입었다. 혼례 시에는 겨울철에도 속적삼을 모시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시옷이 시원한 것과 같이 한평생 속시원하게 지내라는 뜻이라고 한다.

(2) 신부복식

≪사례편람≫에서는 염의(袡衣)의 착용을 권하고 있으나, 관행에서는 길상문을 수놓은 붉은 색의 활옷[華衣]이나 나삼(羅衫)이라고도 부른 초록 원삼을 입었는데 활옷보다 원삼이 더 일반적으로 입혀졌다.

머리치장으로는 솜족두리 또는 화관에 큰댕기(도투락댕기)·앞댕기·다리[髢]로 하였다. 원삼과 족두리 등은 신랑집에서 마련해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을 빌려서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마련하지 못한 경우에는 혼수로 보낸 청·홍 치마감을 양어깨에 두르고 저고리감으로 허리띠를 해서 입는 지역도 있었다. 그 안에는 녹의홍상에 분홍 속저고리를 입었고 얼굴에는 연지·곤지를 찍고 화장을 했다.

① 염의 : ≪사례편람≫에는 “시속(時俗)의 부인복이 잡스럽고 천한 폐해가 있으니 여러 가지로 통용할 수 있는 옷 한 벌을 지어 시집갈 때는 붉은 천으로 옷 아랫도리에 네다섯 치 되는 감으로 단을 쳐서 염의라 하고, 시부모 뵐 적과 제례(祭禮), 빈객(賓客) 때와 습(襲)할 때에는 모두 단을 떼고 사용하여 소의(宵衣)로 대신하며, 단의(褖衣)는 흰색 천으로 지어 옛적 베로 만든 심의로 대신하여, 초상의 역복(易服) 할 때와 기제(忌祭) 때 입으면 만듦새는 간략하고 쓰임은 넓어 올바른 옷에 가까우니 요즘 부인들의 잡스럽고 경박한 옷의 폐해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혼례복으로 염의를 장려하고 있다.

이 염의는 현색(玄色)으로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이 붙었으며 옷감은 능기류(綾綺類)를 사용하였다. 안은 소사(素紗)로 하고 훈색(纁色)의 연(緣)을 둘렀으며 일명 순의(純衣)·단의라고도 하였다.

② 소의 : 사대부가의 부인예복이며 후부(后婦)의 육복(六服) 다음 가는 것이다. 검은색 초증(綃繒) 종류로 만들어지므로 초의(綃衣)라고도 한다. 그 제도는 심의에 근거한 것이고, 육복에서 문장을 없이한 것이며 염의에서 붉은 단을 없이한 것이니, 상의와 하상이 연결된 것이며 단의·순의와 같다. 혼례 때 시부모에게 예를 드릴 때 또는 제사에 참여할 때의 예복으로 착용하였다.

③ 원삼 :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에 의하면 “원삼은 활수장의(濶袖長衣)로서 상복(常服)이 아니고 예복으로 혼례시나 염습시(斂襲時)에 착용하며, 혼례시에는 홍색, 염습시에는 녹색으로 한다.”라고 하고 있고, ≪사례편람≫의 제조(祭條)에서는 원삼이 제복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혼례시에는 홍원삼을 착용한다고 하였으나, 현존하는 자료로 보아 초록원삼이 더 일반적이었다.

민간용의 원삼은 궁중용 원삼과 달리 소매의 색동이 여러 층을 이루고 전체적인 칫수가 작고 금박을 할 수 없었다. 민간인들은 초록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큰댕기와 앞댕기를 늘였다.

④ 활옷 : ≪고려도경≫ 귀부조에 왕비부인은 대홍의(大紅衣)에 회수(繪繡)를 하였으며 국관·서민의 처는 입지 못하였다 하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있는 백화포(白花袍)와 ≪성호사설≫에 혼례신부의 포의 활수대대(闊袖大帶)는 화제(華制)라 한 것은 지금의 활옷을 말한다.

활옷은 조선후기 공주나 옹주의 예복이었으나 혼례 때 일반인의 혼례복으로 허용되었다. 형태는 원삼과 비슷하나 깃이 다르며 다홍색 비단 바탕에 장수(長壽)와 길복을 의미하는 물결·바위·불로초·어미봉·호랑나비·연꽃·모란꽃·동자 등의 수 이외에 이성지합(二姓之合)·만복지원(萬福之源)·수여산(壽如山)·부여해(富如海) 등의 글씨를 수놓았으며, 소매에는 색동과 흰색 한삼이 달렸다. 대대를 띠어 입고, 머리에는 큰비녀를 꽂고 화관을 쓰며 도투락댕기와 앞줄을 늘인다.

⑤ 저고리 삼작 : 신부는 저고리 삼작을 입었는데, 저고리 삼작이란 속적삼·속저고리·저고리 세 벌을 말하며, 반가에서는 이를 반드시 갖추어 입었다. 그 중 속적삼은 고름을 달지 않고 매듭단추로 여미게 되어 있는 홑옷이며, 속저고리는 겉저고리와 같되 그 크기만 약간 작은 것이었다.

혼례에서의 속적삼은 분홍모시적삼으로 만들어 입었는데, 이는 시집가서 속 답답한 일없이 시원하게 살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한겨울이라도 속적삼은 반드시 모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겉저고리는 관례벗김용으로 노랑 삼회장 저고리나 초록 삼회장저고리를 입었다. 따뜻한 시집살이를 하라고 솜을 두는데 여름 혼인일지라도 솜을 두되, 동정 밑으로 깃고대에 솜을 약간만 넣었다.

깃고대에 솜을 두는 것은 시집살이가 되니까 모든 것을 덮어 가지고 잘살라는 뜻과 솜처럼 살림이 잘 일어나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한편 예복을 갖추지 못했을 때에는 저고리의 소매에 거들지를 달거나 흰 수건으로 손을 가려 예복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⑥ 치마 : 신부는 다홍색 겹치마를 입었다. 사대부가에서는 금박단이 달린 스란치마를 입었으며, 보다 격식을 차리는 가문에서는 다홍치마 안에 남색 겉치마를 하나 더 겹쳐 입고 겉의 다홍치마의 앞부분을 징궈서 앞이 약간 들려 밑의 남색 치마가 나오게 하였다.

개화기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은 혼례에도 변화를 가져와 서구식의 신식결혼식이 등장한다. 최초의 신식결혼식은 1890년 2월 정동 예배당에서 올린 박신실과 강신서의 결혼식인데 의식은 서구식이 반영된데 비해, 결혼예복은 전통의 혼례복인 사모관대와 원삼에 족두리를 착용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근대화가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함에 따라 전통혼례의 절차가 간소화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의 전파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어, 서구식 혼례는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신식 결혼식 혹은 예배당 결혼식으로 전통양식보다 적은 비용, 간략한 절차, 간단한 의복이라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신식 결혼식은 늘어나 1930년대 이후엔 예식장에서 거행하는 신식결혼식이 서울에서는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신식결혼식에 착용되던 복식은 신부는 흰 저고리, 흰 치마에 양말과 구두, 장갑도 흰색으로 착용하였으며, 머리에는 베일을 쓰고 화관을 썼다. 반면 신랑은 대부분 프록코트의 양복을 착용하였는데, 개중에는 신랑도 흰 두루마기에 흰 구두를 신은 한복 차림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50년대까지의 일반적인 신식결혼식의 모습이었다.

여자가 서구식 웨딩드레스를 착용한 것은 60년대 이후로 보편화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로는 결혼식에서의 한복 착장이나, 전통혼례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전통혼례에서의 현구고례(見舅姑禮)가 폐백이란 형식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폐백 때 착용되는 복식은, 1959년이나 1966년의 자료에는 남자는 양복, 여자는 녹의홍상(綠衣紅裳)의 치마 저고리를 착장하고 있는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반적으로 남자는 사모관대, 여자는 원삼이나 활옷을 착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모에 금테장식을 한다거나, 단령깃에 이색의 파이핑, 녹원삼에 목단문을 수 놓은 것 등 전통성을 벗어난 양식이 보인다.

근래에 들어 일부에서는 전통 혼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전통혼례전시회와 전통 관혼상제 의식 재현행사가 개최되고, 다양한 장소에서 전통혼례가 올려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혼례복으로 궁중복식이 대여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일반적인 결혼식의 폐백 때 시부모만이 아닌 장인·장모에게도 절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 현구고례와 서현부지부모의 예가 합해진 양상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복식문화사』(유희경·김문자, 교문사, 1998)
『한국복식사』(유송옥, 수학사, 1998)
「전통의례복식의 변천」(이은주, 『한국 복식 2천년』, 국립민속박물관편, 1995)
「혼례복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홍나영, 『사례복의 전망과 발전』-한복입는 날 선포3주년기념학술 세미나논문집-, 한복사랑운동협의회, 1999)
「한복을 응용한 혼례복 디자인에 관한 연구」(이정수·송명견, 『복식』49호, 1999)
집필자
박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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