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李喜敬)은 일제강점기 미주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 영남부인회(嶺南婦人會) 등의 활동을 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금례(李今禮), 이혜경, 권희경, 권혜경 등의 이름도 사용하였다. 1894년 1월 8일, 경상북도 대구 명치정(明治町) 2정목(町目)[현재 중구 계산동 2가] 89번지에서 아버지 이종하와 어머니 김정원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12년 5월 31일 대구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고, 그 해 10월에 19세의 나이로 사진결혼(寫眞結婚)을 하여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에서 영양 출신의 권도인(權道仁)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2녀(권영만, 권 넬슨, 권마그레트 권에스더)를 두었다. 하와이의 대한부인구제회, 영남부인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6월 2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길을 건너다가 6톤 트럭에 치여 큐인병원으로 급송되어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사망하였다. 같은 해 6월 30일 다이몬헤드 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2004년 4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12년 하와이 여자청년회 안에 마더클럽을 조직하였다. 1918년말 10만불의 자금을 만들어 4살 난 딸을 동반하고 친정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세관에서 미화를 소지한 사실이 적발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3·1운동의 소식을 들었으며, 1920년에 석방되어 하와이로 돌아갔다. 1919년 3월 21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설된 대한부인구제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매주 떡과 잡채, 산적 등 한식을 만들어 팔아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28년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하고 경상도 출신의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영남부인회를 결성하였다. 영남부인회는 1929년 영남부인실업동맹회(嶺南婦人實業同盟會)로 개명하였으며, ‘실업발전과 동포간의 친목 증진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한인 부인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의 후원, 재미한인사회의 구제사업 활동 등에 공헌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각종 독립의연금과 전쟁후원금, 군사금 등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1940년 초반에 대한부인구제회에서 호놀룰루 지방대표, 승전 후원금 모집위원, 사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재무부 위원과 조사부 위원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 후에는 1946년 2월 중순에 조직된 전후한국구제회(戰後韓國救濟會)에서 회계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200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