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족연합위원회 ()

근대사
단체
1941년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성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
내용 요약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1년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로 성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이다. 미국에 있는 한인 9개 단체가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와 국방 활동을 후원하였다. 연합위원회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되어 조직이 크게 약화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에 대표단을 파송하여 중도적 입장에서 건국운동에 동참하며 국가재건사업에 주력하였다.

정의
1941년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성립된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
설립목적

재미한인 단체들의 역량을 집중하고 확대시켜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조직구성

참가 단체는 북미대한인국민회, 동지회, 하와이대한인국민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하와이지부, 의용대미주후원회(민족혁명당미주지부로 바뀜),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여자애국단 등 9개 단체였다.

조직은 위원제로 하여 의사부와 집행부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의사부는 호놀룰루에, 집행부는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두었다. 초기 임원을 보면, 의사부 위원은 이원순 · 안원규 · 김현구 · 도진호 · 김원용 · 조병요 · 손승운 · 전경무 · 차신호 · 강상호 · 임성우 · 민함나 · 심영신 · 유진석 · 최두욱 · 정두옥이었다.

집행부 위원은 김호 · 한시대 · 김병연 · 송철 · 송종익 · 이경선 · 송헌주 · 박경신 · 김용중 · 김성낙 · 유일한 · 김용성 · 신두식 · 김혜란 · 임병직이었다. 역대 위원장은 의사부에 이원순 · 안원규 · 김원용, 집행부에 김호 · 한시대가 역임하였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의거하여 연합위원회에는 외교위원부를 두었는데, 그 책임자로 이승만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한길수를 국방공작봉사원으로 임명해 외교 활동을 뒷받침하게 하였다.

기능과 역할

재정 모금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그리고 국방 공작활동에 재정을 후원하였다. 이에 따라 전체 모금된 재정의 2/3는 주1의 임시정부로 보내고, 1/3은 미주에서의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데 사용하였다.

또한 연합위원회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개시 이후 재미 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한인 신분증 발급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1942년 4월 26일부터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일명 맹호군)을 결성해 미주한인의 대일항전 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리고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이승만과의 갈등과 이승만 · 한길수 간의 분쟁으로 내부 분열이 발생하면서 조직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결과 중한민중동맹단과 동지회가 탈퇴하였다.

그 이후 연합위원회가 별도로 워싱턴외교사무소를 설치하자 여기에 반발해 민족혁명당미주지부가 탈퇴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연합회에 참가했던 북미유학생총회도 탈퇴해 연합위원회는 크게 위축되었다.

더구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싸고 중경의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지지하자 이에 적극 반발한 연합위원회는 그 동안의 임정 지원태도를 바꾸어 반임정으로 돌아서기까지 하였다.

해방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송해 건국운동에 동참하였다. 단장 한시대, 부단장 김원용, 서기 도진호, 김병연, 재무 송종익 · 최두욱을 비롯해 김호 · 전경무 · 조제언 · 박금우 · 안정송 · 김성낙 · 안창호 · 정두옥 등 14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국내에 약 8개월간 체류하면서 국가재건사업에 주력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호와 김원용은 미군정의 입법의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연합위윈회 대표단은 좌우익의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했으나 혼탁한 당시 정치 상황 하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재미한인오십년사(在美韓人五十年史)』(김원용, 1959)
「제2차 세계대전기(世界大戰期) 재미한인사회(在美韓人社會)의 동향(動向)과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활동(活動)」(고정휴,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49, 1993)
『신한민보(新韓民報)』
『국민보(國民報)』
주석
주1

중국 남서부에 있는 중앙 직할시. 양쯔강(揚子江)과 자링강(嘉陵江)의 합류점에 위치한다. 제이 차 세계 대전 때에 국민 정부가 있었다. ⇒규범 표기는 ‘충칭’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홍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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