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가(利見臺歌)
「이견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왕의 부자가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할 까닭이 없는데, 이웃나라에 나가서 회동(會同)하였는지도 모르겠고, 혹 인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평을 더하고 있다. 『고려사』의 「이견대」에 의하면 이견대는 왕의 부자가 상봉한 곳이며, 「이견대」는 왕의 부자가 상봉함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의 “후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의 이름이 이견대”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고 기뻐하여 그 기념으로 이견대를 축조하고 682년에 「이견대」를 지었다는 해석도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견대잡고」(박노춘, 『문호』5,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