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법 개정운동은 반세기가 넘도록 끈질기게 지속된 한국사회의 대표적 여성운동이자 법을 통해 사회변화를 추구한 시민운동으로, 한국에서 가족법이란 「민법」 제4편 친족 및 제5편 상속을 편의적으로 총칭하는 용어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정부는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한국전쟁 중 김병로(金炳魯) 법전편찬위원장은 민법초안을 작성하여 1954년 10월 26일 민법안을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당시 제헌헌법에는 ‘남녀동권’을 규정하였으나 민법의 친족과 상속편에서 여성차별적인 제도를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 내용은 친족편에서 ① 부(夫)의 전처 소생 자녀나 혼인 외 출생자와는 계모 및 적모관계가 친자와 동일하게 인정되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 점, ② 친족범위에 있어 부측을 처측보다 광범위하게 규정한 점, ③ 처가 부의 혈족 아닌 직계 비속(卑屬: 자기보다 손아래 자손)을 입적시키려 할 때는 부가(夫家)의 호주 및 부(夫)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만(제778조), 부(夫)가 혼인 외 출생자를 입적시킬 때는 처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점, ④ 여호주는 호주 상속할 양자를 입적할 때에는 호주권을 내놓아야 하고(제784조) 여호주가 혼인하면 폐가를 해야 하는 점(제786조), ⑤ 부계(父系) 혈통만을 중심으로 한 동성동본 불혼조항을 둔 점(제802조), ⑥ 부부동거 장소를 부(夫)의 주소나 거소로 지정한 점(제 819조), ⑦ 부부 각자 명의로 취득한 재산은 각자의 특유재산으로 인정하나 소속이 불분명한 재산은 부의 특유재산으로 추정하는 점(제822조), ⑧ 자녀에 대한 친권행사자는 부를 우선으로 하고 모를 이차적으로 한 점(제906조) 등을 들 수 있다. 상속편에서 지적할 수 있는 불평등 조항은 ① 딸의 호주 상속 순위가 최하위인 점(제988조), ② 출가한 딸은 재산상속에서 제외된다는 점(제1007조), ③ 부는 처의 재산을 직계비속과 공동 상속하지만 처는 부의 재산을 직계비속 및 부의 직계존속과 공동 상속하도록 한 점(제1009조), ④ 함께 재산을 일군 처의 상속분이 호주 상속보다 적고, 기타 직계비속 및 부의 직계존속과 균등한 것 등이었다.
최초의 여성법률가가 된 이태영(李兌榮)은 1952년 시보연수 중 민법안에서 호주제도가 계승되고 남녀차별적 규정들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고 여성문제연구원 황신덕(黃信德) 원장과 정광현(鄭光鉉) 교수와 함께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태영의 주도하에 대한YWCA연합회․대한부인회․대한여자청년회․대한여자국민당․여성문제연구원․대한조산원회․여자선교단으로 구성된 ‘여성단체연합’을 조직하였고 1953년 법전편찬위에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1954년 이후에도 관계기관이나 조직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방문 설득 활동을 벌이는 한편 여론 환기를 위한 집회․방송․강연 등을 전개하였다. 1956년에는 여성법률상담소(이사장 황신덕, 소장 이태영)가 설립되고 본격적인 개정운동이 전개되었다.
1957년 11월 대표 제안자 정일형(鄭日亨)의원 외 33인의 이름으로 여성입장을 반영한 민법 수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당시의 지배적인 ‘전통’과 ‘순풍미속(淳風美俗)’의 원칙에 가로 막혀 최종 법안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여성단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나 가정법원 설치만을 승낙 받았다. 1962년 가족법 개정에서는 차남 이하의 혼인에 따른 법정분가 및 호주의 강제 분가제도가 채택되었고, 1963년 가사심판법의 제정 공포, 10월 가정법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1972년 12월, 제7차 개헌으로 유신헌법이 발효되면서 각 단체별로 가족법 개정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3분의 1이 간접 선출되었고, 여성의원이 전체 12명으로 증가하자 개정운동 측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1973년 6월 28일 61개 여성 단체들이 연합해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를 결성하고 회장 이숙종 국회의원과 1,200명 여성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10개 항의 개정 요강과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본 촉진회는 박병호, 김주수, 김용한, 한봉희, 이태영을 자문의원으로 의뢰하여 가족법 개정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가족법 344개 조항 중 81개 조문을 수정하고, 19개 조항을 신설하는 방대한 작업에 기초한 개정안을 1975년 4월 9일 국회에 제출하였다.
한편 유림의 조직인 ‘유도회’는 전국총회에서 가족법 개정을 반대하는 모임을 개최하였고, 1974년 10월에는 개정에 반대하는 34,000명의 서명을 국회 사무국에 제출하고, 이어 1974년 11월 ‘가족법개정저지범국민협의회’를 발족한 전국 유림들도 광범위한 가족법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에게 현행 가족법의 존치는 한국의 ‘전통’과 도덕성의 존중이며,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항하는 동양 정신성의 숭앙이었다. 가족법 개정 측은 인본주의, 민주주의, 국력, 민족중흥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내세우며 개정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가족법 개정운동은 한국사회의 ‘전통’과 ‘근대성’이 대화하거나 융합되지 못한 채 갈등하고 격돌한 사례로서도 교훈을 지닌다.
드디어 1977년 12월 국회에서 가족법의 일부 개정이 의결되었고, 「혼인에 대한 특례법」이 제정되어 1979년 1년 동안 한시적으로 동성동본간의 혼인신고 및 자녀입적신고가 허용되었다. 민법개정 대안 중 상속규정의 일부 개정은 ① 법적 상속에서 처와 미혼 딸의 비율을 높임, ② 피상속인이 사망 전에 재산을 제삼자에게 증여하더라도 일정 비율을 보전하여 상속권자들에게 물려주는 유류분 제도의 신설로 이루어졌다. 부부의 권리 규정에서는 ① 친권에 대한 부모 공동행사, ② 소유불명 및 귀속불분명한 재산에 대한 부부공유 추정이 가능해졌다.
가족법개정운동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어, 1984년 7월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관으로 41개 여성단체 대표의 발기로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단체연합’(회장 이태영)을 결성, 가족법 개정 촉진대회를 개최한 이후 서명운동 및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1983년 5월, 정부가 서명한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의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어 본 협약을 위반하는 성차별적 가족법 규정의 개정 압력을 가하기에 좋은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또다시 여야당 모두 소극적인 태도로 일변, 개정은 무산되었다. 1986년 11월 개정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그해 12월 1일 5,000여 명의 유림이 국회 정문 앞에서 ‘가족법 개정 결사반대시위’를 벌였다.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개정 의제는 호주제와 동성동본금혼규정의 폐지에 있었고 유림은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와중에 법무부 장관이나 국무총리 등 고위 관료들은 가족법 개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함으로써 사실상 유림과 다르지 않는 신조를 드러냈다.
1987년 한국사회에 들불처럼 타오른 광범위한 민주화의 요청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진보적인 국회가 구성되었다. 그 해 12월에 「혼인에 관한 특례법」이라는 한시적 특별법이 또다시 국회를 통과하였다. 1988년 11월 여성단체의 개정안은 153명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고, 또한 여성연합회는 5만 1,630명의 찬성자 서명을 첨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1989년 2월부터 개정안의 심의를 시작하였고, 여성단체 개정안을 반영하여 국회 법사위가 마련한 수정안이 1989년 12월 19일 제13대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199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본 개정은 광범위한 가족법의 개정으로서, ① 호주제는 존치하되 호주 상속을 승계로, 유명무실한 호주의 권리와 의무 삭제 등 개정, ② 친족범위는 부, 모계 8촌, 인척 4촌으로 개정, ③ 이혼배우자의 재산분할청구권 신설, ④ 친권제도상 부모 친권 공동 행사, 부모 의견 불일치 때는 가정법원이 결정, 이혼한 어머니나 혼인 외 자(子)의 생모도 협의 또는 가정법원 결정으로 친권행사 가능, ⑤ 이혼부부의 자녀양육에 관하여 부모 평등 면접교섭권 신설, ⑥ 재산상속제도에서 직계비속이면 아들 딸, 장남 차남, 기혼 미혼 차별 없이 균분 상속, 배우자에게는 고유 상속분의 5할 가급, 상속인의 범위 축소 등 개정, ⑦ 적모서자와 계모자 사이의 당연 법정 혈족 관계 성립 폐지, ⑧ 부부의 공동 생활 비용 부부 공동 부담 등이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 의제였던 호주제도와 동성동본금혼제도 폐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9년 개정 이후 1997년은 가족법 개정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해이다. 그 해 3월 8일 여성의 날에 ‘부모성 같이 쓰기 운동’이 제안되어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범사회적 각성이 일어났고, 7월 16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동성동본금혼’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이 시기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호폐모)’과 같이 평범한 시민들이 주체가 된 모임이 결성되었고, 1999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한의사협회 등이 ‘호폐모’와 광범위한 연대를 이루게 된다. 이 단체들은 당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여기서 호주제도에 따른 구체적 피해 사례가 집적되었다. 이혼의 증가 및 재혼의 증가 등에 따른 여성과 그 자녀들의 피해사례, 가족의 소규모화 속에서 ‘아들출산’의 압력 하에 놓인 여성의 고통이 대중의 의식을 일깨운 것이다. 또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같은 전문가 집단이 호주제 폐지에 동참하여 2000년에 ‘호주제 위헌법률심사제청’을 준비하였고 이 노력은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의 핵심 조문인 민법 제778조, 제781조 제1항, 제826조 제3항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의 결실로 맺어졌다. 2003년 강금실을 수장으로 한 법무부가 ‘가족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호주제도를 삭제한 민법안을 마련하여 2003년 9월과 2004년 6월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와중에 유림도 쉬지 않고 있었으니, 2000년대에는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정가련, 공동대표 구상진 변호사)’의 출범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이전시기에 비해 보다 구체적으로 호주제도가 한국의 역사에 기초한 제도라는 점을 구명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2005년 2월 2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해당 민법 개정안을 찬반 표결 끝에 찬성 11표로 가결하였고, 3월 2일 개최된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296명 중 235명이 참여하여 찬성 161표를 기록했다. 이로써 1953년부터 시작된 반세기에 걸친 호주제 폐지 운동은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본 개정은 ① 민법 제4편 제2장 ‘호주와 가족’이 삭제되고 민법 제4편 제8장 (호주 승계의 장)이 완전히 삭제됨, ② 자녀의 성과 본에 관한 규정 개선, ③ 동성동본금혼규정이 삭제되고 새로운 금혼규정 마련, ④ 친생부인의 소는 제소권자를 부 뿐 아니라 처로 확대, ⑤ 여성에 대한 6개월의 재혼금지 규정 삭제, ⑥ 친양자제도(親養子制度) 도입, ⑦ 피상속인 부양자에 대한 상속 기여분 제도 도입 등을 포함한 대변혁이었다. 호주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부속법인 호적법도 폐지되어 2007년 5월 17일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는 호주나 ‘가’의 개념 없이 개인별 편제를 따르고 있어 혼인이나 이혼, 재혼, 입양 등에 의해 가를 옮긴다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의 가족법 개정운동은 가족관계 변화 뿐 아니라 양성평등의 고양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관계 설정 등에 있어 광범위한 의미를 가진다. 서양에서 여성운동이 여성의 공적영역진출이라는 의제에 의해 출발하였다면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는 가족내 양성평등이 오랜 숙원사업이었다는 점이 대비된다. 특히 반세기 넘게 지속된 호주제 폐지운동은 세계적으로도 기록될 법개정 여성운동이다. 호주제도가 식민지 유산과 가지는 관계를 생각할 때, 한국의 가족법 개정운동은 여성운동이자 법개정운동이자 탈식민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