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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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이선평(李仙枰)이 창시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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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5년 이선평(李仙枰)이 창시한 종교.
내용

1882년 황해도 문화군 구월산 부근에서 태어난 이선평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그 학문적 배경에 각세도가 중국적인 사유체계(思惟體系)에 바탕을 두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홀로 면학에 힘쓰던 이선평은 중국으로 여행길에 나섰다가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진무외(天下大寶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허공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구월산으로 들어가 10여 년간 수도생활을 하였는데 주로 의술, 복점, 풍수지리서를 탐독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해주에서 군의(軍醫)생활도 잠시 하였으나, 군대 해산 이후 연안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중 32세 되던 해인 1913년 말에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를 시작한 지 488일 만인 1915년 4월 15일 정오에 남쪽 하늘에 황금색으로 쓰여진 각세도라는 세 글자가 나타나면서 대오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無窮造化解脫死滅永歸靈界)’라는 16글자로 된 주문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초하루부터 매일 한 자씩 하늘에서 글씨를 받아 삼십계명(三十戒名)을 얻고,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 그 뒤 기도를 계속하여 천일기도를 끝내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선평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유교·불교·선교 및 기독교의 네 가지 진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특히, 후천의 새로운 세상에서 사용할 언어의 자모법(字母法)인 ‘원사(源史)’를 내놓았다. 민족항일기에 각세도는 한때 3만여 명의 신도를 가지는 교단이 되었다.

8·15광복 후 이선평은 그의 독특한 교리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관체제(四觀體制)를 두고 10만에 가까운 신도를 확보했으나, 1956년 이선평의 사망과 함께 각관(各觀)이 분리독립하면서 신도들이 이탈, 교세가 위축되었다.

각세도의 교리는 중국적인 우주관의 형성원리인 역학(易學)과 오행설(五行說)에 근거하고 있다. 역학과 음양오행설에 따라 시간과 공간(방위)의 개념을 도입하고, 모든 것이 귀일하는 중앙을 수도이상(修道理想)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역학에 의거하여 운수변역(運數變易)에 따른 선천(先天)과 후천의 관념을 상정하여 민족항일기에 대부분의 신종교에서 엿볼 수 있는 후천개벽 내지 종말론적인 이상세계의 도래를 선언했다.

이선평의 교단운영방식은 방위의 개념에 따른 사관체제 이외에도 천지운행에 따라 30인의 제자를 두고 30암(三十菴)이라 호칭하여 각각의 소임을 맡긴 점이다.

1956년 그는 법통을 승계할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살던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아래 초막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뒤 사관(四觀)은 각각 분리되어 독립하였는데, 대전에 본부를 두고 정도교(正道敎)라고 개칭한 신태제(申泰濟)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는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세운다고 선언했었으나 신태제의 사망과 함께 소멸되었다.

현재 각세도는 남관을 이끌던 장명성의 대각교에서 각기 분파한 충북 영동군 학산면 소재의 각세도 본관(대표 이주원)과 각세도관(대표 박노영), 각세도남관(대표 전태성), 그리고 이선평과의 직접적인 교맥이 없이 생겨난 서울시 동대문구 상봉동 소재의 각세도천지원리교(대표 이성재) 등의 군소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대개 50명에서 100여 명의 미약한 교세를 유지하면서 자가수도하는 신도들로 구성되어 본격적인 교단 활동은 쇠퇴일로에 있는 편이지만, 1975년에 창교된 각세도천지원리교는 1976년부터 ≪각세훈사(覺世訓詞)≫ 2권을 비롯하여 ≪응지효행(應志孝行)≫·≪신앙의 길≫·≪천지대법전(天地大法典)≫·≪도생수첩≫ 등 각종 간행물을 출판하여 교리체계화 작업을 진행했다.

한편,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간 관악산 기슭에 있던 도조 이선평 묘역 성화사업을 추진하는 등 활발한 현대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각세도는 상당한 학문적 수련을 배경으로 세련된 교리체계를 갖추었으므로 이론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단운영 자체가 현실적인 접근방식이었다기보다는 난해한 교리상의 원리에 입각했기 때문에 제도상의 합리성이 결여된 것이 교단발전의 제약조건이었다.

또한, 각세도는 비록 후천개벽의 이상을 실천하는 것을 종국의 목표로 설정하지만 여타의 신종교처럼 지나치게 종말론적인 색채를 강조하지 않고 또 주술성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점에서 대중적 규모의 신도를 일시적이나마 포섭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신종교운동 가운데에는 두드러지게 이론적인 특질을 가졌으며 내면화된 종교체험을 강조함으로써 교단활동이라기보다는 은둔적인 자가수도의 경향으로 흘렀다.

또한, 교조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못함으로써, 생전이나 사후에 그의 인격과 관련된 신비적인 특질에 대하여 신도들의 수용태도가 적극성을 띠지 못한 점이 특색이다.

교조의 신비체험이 강조될수록 신도층의 신앙이 두텁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각세도는 교조의 신격화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선교·기독교 및 이슬람교까지도 거론한 점에서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절충주의와 후천개벽의 이상실현을 목표로 한 것 등이 여러 신종교의 주장과 일치한다.

참고문헌

『각세진경』(차갑순, 각세도본원, 1960)
『응지효행』(이성재, 각세출판사, 1979)
『각세훈사』(이성재, 각세출판사, 1979)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한국종교학회, 1985)
『한국신흥종교총람』(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한국신종교조사연구보고서』(한국종교연구회, 1996)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 외,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저, 고려한림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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