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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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교
개념
조선후기에 남조선이라는 지복한 낙원 또는 이상향을 대망하던 민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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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에 남조선이라는 지복한 낙원 또는 이상향을 대망하던 민간신앙.
내용

조선 후기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민중에게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이상경(理想境)의 대망사상으로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정신의 지평에 잠재하는 낙원 추구의 보편적인 원망(願望)이라는 관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 나름대로 낙원을 동경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초월적인 이상경을 인간의 의지로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지상천국 또는 천년왕국 운동과 같은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다.

우리 나라에서도 동학이 표방하는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이나 그 뒤에 생겨난 신종교들의 교리가 모두 이러한 낙원 동경의 이상과 관계가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서구의 유수한 사상가들, 즉 영국의 모어(More,T.)나 이탈리아의 캄파넬라(Campanella,T.)가 생각해 낸 ‘유토피아’나 ‘태양의 도시’와 남조선신앙을 유비(類比)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순수한 창작물로서 가구(假構)에 불과한 데 반하여 남조선신앙은 민간 전승의 관념형태로서 조선 후기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적 유토피아사상으로서의 남조선신앙은 구체적으로 현실성 있는 이상향(理想鄕)을 추구하려는 논리구조가 미숙하다.

문제는 강력한 인격적 존재를 표상한다든지 시간적·공간적 설정 자체가 매우 애매모호한 데서 오는 것으로, 어느 누가 언제 어디에 어떠한 낙토(樂土)를 실현한다는 현실감각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간적·공간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이상향에 대한 대망으로서의 남조선신앙이 미성숙의 공상적 수준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여 남조선이라고 하는 지연성과 결부된 신앙의 상징으로 구현되었는가 하는 점이 의문인데, 이것은 정감록신앙과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가운데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정감록신앙은 삼절운수설(三絶運數說)·계룡산천도설(鷄龍山遷都說)·정성진인출현설(鄭姓眞人出現說)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형성 시기가 대체로 조선 후기라는 점에서 남조선신앙과 일치한다. 두 신앙 다 같이 미래국토의 대망 신앙이라는 점에서 민중의식의 미분화된 관념복합(觀念複合)이라고 볼 수 있다.

남조선신앙은 적어도 참위설(讖緯說)·감결(鑑訣) 등이 유포되는 가운데 정착되어 갔고, 따라서 정감록신앙이 형성되는 가운데 파생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증거로 ≪정감록≫에 열거되는 십승지지(十勝之地)가 모두 우리 나라의 남쪽 부분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십승지지란 말하자면 피난 내지 은둔의 최적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정감록신앙이 널리 퍼졌던 때가 임진왜란을 거쳐 병자호란 이후일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이 십승지지가 북쪽에서 밀려오는 병화(兵禍)를 피하는 데 가장 알맞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조선신앙은 애초에 현실적 질곡, 무엇보다도 병화에 대한 소극적인 대처로서의 보신책이 점차 낙원 동경의 사상과 결부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향을 스스로 쟁취하겠다는 적극적인 관념 형성이 미흡한 실정에서 오랜 국난의 체험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 밀려 내려오는 외민족의 침략 세력에 대응하는 수단은 사적(私的)인 자기 보존의 방책이었다고 생각할 때, 이러한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민간신앙의 수준으로 발전해 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생각은 점차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회경제적인 변수와 함께 적극적인 미래 국토의 실현이라는 주술적 원망(願望)과 불가피하게 결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감록신앙이 담고 있는 십승지지사상 및 자연지리적 조건과 관련된 남조선신앙이 미분화의 관념복합을 이루었듯이, 정감록신앙의 반왕조적(反王朝的)인 진인출현설이나 계룡산도읍설의 생생한 대망은 남조선신앙의 미래국토 대망을 한층 현실 가능한 것으로 부각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남조선신앙과 정감록신앙은 어디까지나 관념복합으로서 일체를 이루는 것이며, 남조선신앙이 민중의 심혼에 표류하는 미래국토의 소박한 대망사상이라면, 정감록신앙은 적어도 이것을 바탕으로 참위설·풍수설 등에 의해 논리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시간적으로 볼 때 남조선신앙이 정감록신앙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정감록신앙의 내용인 피난처로서의 십승지지가 남한 전역에 분포하는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타당한 입론(立論)인 점은 틀림없다.

이러한 초역사적인 원초(原初)의 소박한 관념이 정감록신앙의 참위설 및 풍수설 내지 진인출현설과 결부되면서 역사적인 모습으로 구체화하고, 따라서 민중운동과 결부된다.

1737년(영조 13) 지리산 하동(河東) 일원에 신왕조의 도읍을 예정했다고 하는, 남변(南變)이나 곽재우(郭再祐) 및 서경덕(徐敬德)의 주기론적(主氣論的) 영향 아래 비기(祕記)를 신봉하는 유랑 지식인들에 의해 주동이 된 변란은 직접적으로는 참설이나 감결과 관련이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남조선신앙의 미래국토 대망사상이 본류를 이루고 있다.

1748년의 이른바 ‘이재궁궁(利在弓弓)’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일어난 반란도 남조선신앙과 관계가 있다. 영조·정조 시대에는 19세기와 같은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감록신앙과 감결이 크게 유행하여 소규모의 사회적 반역의 무리들이 예외 없이 진인출현설이나 감결을 가탁(假託)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부터 남조선신앙은 비록 완성되고 고정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민중운동의 저변을 흐르는 미래국토의 대망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모습으로 채색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남조선신앙이 한국적 유토피아사상으로서 무엇보다도 신앙의 논리로 정연한 체계를 갖추는 것은 최제우(崔濟愚)의 동학농민운동에 나타난 후천개벽의 이상에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남조선신앙과 같은 미래국토의 대망이 단순한 즉흥적인 가구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정황에 접근하는 형태의 후천개벽사상으로 전개된다.

물론, 동학농민운동은 순수한 종교운동으로서의 한계에 안주하려는 북접측(北接側)과, 이것을 사회 개조의 이데올로기로 생각하는 남접측(南接側)과의 노선투쟁에서 남접측이 운동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종교적 신앙 내지 신비적인 성격이 많이 퇴색하는 대신 현실 개혁의 의지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따라서 남조선신앙이 내포하는 소박한 원초적인 원망이라는 종교적 동기는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직후부터 20세기 초에 대두하는 민족종교운동에는 이 남조선신앙의 원형(原型)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국조 단군의 성업을 다시 승계한다고 한 대종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항(金恒)이 체계화한 ≪정역 正易≫에서 우리 나라의 강역을 후천개벽이 일어날 터전이라고 이해했다든지, 또한 강일순(姜一淳)이 해원상생(解寃相生)이 일어나는 천지공사(天地公事)가 이루어지는 터전을 우리 나라로 본 것은 남조선신앙의 자연지리적인 소극적 성격을 벗어나서 보다 포괄적인 원융상(圓融相)을 드러낸 것이다.

참고문헌

『택리지』(이중환)
『동경대전(東經大全)』
『조선상식문답』(최남선)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정감록집성』(안춘근 편, 아세아문화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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