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장(榷場)은 고려시대 고려와 거란·여진족 등 북방 민족 사이의 교역을 위해 설치된 무역장이다. 각장은 호시의 일종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각장은 1005년(목종 8) 거란에 의해 보주(保州)에 설치된 것이 그 최초의 일로, 각장 개설은 비록 경제적 무역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고려와 여진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각장은 서북면으로는 예종 때 의주·정주(靜州)에, 동북면으로는 고려의 정주(定州)와 여진의 청주(靑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각장은 원래 송나라의 태조 이후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 사이에 개설된 공식 무역장을 일컫던 용어로, 호시(互市)의 일종이었다. 이민족과의 분계선 주변의 백성과 특수업에 종사하는 호(戶)를 관할하에 두었고, 이들에게 증서를 발급하여 교역을 관리하였다. 각장 교역은 많은 통제를 받았는데, 거래될 수 있는 물품이 제한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거래의 우선권은 관에 있었다. 송나라와 요나라 · 금나라 사이의 무역장은 물론, 송과 서하(西夏)와의 무역장도 각장이라고 칭하였다. 일명 각서(榷署)라고도 하며, 그를 관리하는 관청은 각무(榷務)라고 하였다.
각장에서는 관무역과 민간 무역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요나라와의 사이에 설치된 웅주(雄州) · 패주(覇州)의 각장, 금나라와의 국경에 개설된 사주(泗州) · 수주(壽州)의 각장, 서하와의 경계에 열렸던 보안군(保案軍) 각장 등이 송나라 때의 대표적인 각장이었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각장은 1005년(목종 8) 거란에 의해 보주(保州 : 후에 의주(義州)로 개칭됨)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이는 2차에 걸친 거란의 여진 정벌과 제1차 고려 침입 후에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보주의 각장 개설은 비록 경제적 무역을 그 근본 목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고려와 여진에 대한 정치 · 외교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때의 각장은 개설 5년 만에 일어난 거란의 제2차 고려 침입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평화 관계가 종식되면서 폐지되었다. 따라서, 보주의 각장을 통한 양국의 교역은 그리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 선종 초에 거란은 압록강 연안에 각장을 재개하려 계획하고 이를 고려에 강요하였다. 고려는 거란의 각장 재개 계획이 당시 강동지역(江東地域)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기미권(羈縻權: 지배권)에 위협을 가해 고려와 여진의 경제 · 군사적 유대 관계를 차단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의심해, 1086년(선종 3) 한영(韓瑩)을 고주사(告奏使)로 보내 그 재개 계획의 철회를 요구했고, 2년 후 거란으로부터 이를 중지한다는 확약을 받았다. 결국, 보주의 각장이 폐지된 이후 양국의 교역은 사신의 왕래에 따른 협대무역(夾帶貿易)과 국경 지역에서의 밀무역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당시 각장 무역을 포함한 양국의 각종 무역에서는, 고려의 금 · 은 · 동 · 종이 · 먹 · 응골(鷹鶻) · 포백류와 공예품 등이 수출품으로, 거란의 능라(綾羅) · 단사(丹絲)와 양을 비롯한 가축류가 주된 수입품으로 교역되었다.
한편, 고려와 여진 사이의 각장은 서북면으로는 예종 때 의주 · 정주(靜州)에, 동북면으로는 고려의 정주(定州: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와 여진의 청주(靑州 : 지금의 함경북도 북청)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진과의 각장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이로 인해 여진의 반강제적 호시 요구가 자주 제기되었다. 이때 이들 각장에서는 주로 여진의 보물과 고려의 미곡이 교역되었다.
동진국의 무장 포선만노가 1224년(고종 11)에 각장 설치를 요구하면서 “이전처럼 매매하자.”라고 한 것으로 볼 때 각장을 통한 교역이 국가의 흥망에 따라 중단된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국의 물자 부족을 매매 또는 교환을 통해 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필요성은 꾸준히 요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각장의 형태는 조선 초 여진과의 사이에 무역소(貿易所)의 개설, 후기의 명나라 · 청나라와의 사이에 중강개시(中江開市)를 비롯한 각종의 개시가 설치된 것에서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