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강개시(中江開市)는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기근 구제와 군마 조달을 위해 명에 요청해 개설한 공무역의 일종이다. 의주 북단의 중강 일대에서 열렸기 때문에 '의주개시'로도 불린다. 전란이 종식된 후 중강개시를 통해 국가 기밀이 누설되고 밀무역이 성행해 1601년(선조 34) 폐지되었다가 명의 요구로 재개되었으며 후금의 성장으로 북변의 위기가 고조되자 1613년(광해군 5) 폐지되었다. 1646년(인조 24) 청의 요구로 재개되었으나 결제 수단으로 은 대신 소청포가 사용되는 등 무역 효과가 크지 않자 후시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중강은 평안도 의주 북단 압록강 일대의 물줄기가 갈라져 소서강(小西江), 중강(中江), 삼강(三江)으로 강 이름이 붙여진 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중강개시가 개설된 곳은 중강 건너편 검동도 혹은 어적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중국 사행(使行) 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대외 교통로로서 조선시대에는 '의주로(제1대로)'의 연장선에 있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중강개시를 '의주개시(義州開市)'로도 불렀다.
중강개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기근 구제와 군마(軍馬) 조달을 위해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요동에 자문을 보내 개설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매우 심한 식량난으로 무명 1필 값이 피곡(皮穀) 1두(斗)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강에서는 쌀 20여 두에 달했고, 은 · 구리 · 무쇠로 교역한 자는 10배에 가까운 이익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약, 인삼 등 밀무역이 성행하고 국가 기밀이 누설되는 등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여기에 후금의 성장으로 군사적 긴장 관계가 조성되면서 중강개시는 1601년(선조 34) 폐지되었다가 이듬해 명나라의 요구로 재개되는 등 운영이 불안정해 결국 폐지되었다. 명과의 교역 창구였던 중강개시는 1609년(광해군 2) 혁파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명의 예부에서 발급한 자문에 의거해 1613년(광해군 5) 1월 26일에 완전히 폐지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묘호란 · 병자호란을 거쳐 중원을 장악한 청은 조선에 세폐(歲幣)뿐 아니라 명에 바치던 방물을 바치도록 했으며, 1646년(인조 24)에는 자문을 보내 중강개시 재개를 요구했다. 이에 3월 15일과 9월 15일의 두 차례에 걸쳐 교역하도록 정했다가 농번기에 해당된다 하여 2월 15일과 8월 15일로 고쳐 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재개된 중강개시에는 서울뿐 아니라 개성, 황해, 평안도 상인 232명이 참여했다.
교역 방식은 거래할 물종을 개성부(開城府)와 황해도 · 평안도 감영(監營)에서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고, 무역할 별장(別將)을 정해 의주에서 모여 기다렸다가 기일이 되면 별도 차사원(差使員)이 역학훈도(譯學訓導)와 상인들을 거느리고 중강에 가서 봉성통관(鳳城通官)과 값을 정하고 서로 교환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강개시를 통해 조선은 농우(農牛) · 소금 · 지물(紙物)과 해대(海帶) · 해삼 · 면포 · 사기 등을 수출했는데, 청 상인들은 이중 소와 소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단, 중강개시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사상(私商)의 잠입을 일체 금하고 암말(牡馬/한자는 '수말'입니다/)과 인삼의 교역도 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사실상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공식 거래 수단인 은(銀)이나 말, 면포 대신 만주에서 생산되는 소청포(小靑布: 1필당 은 3전 5푼)를 값으로 받게 되면서 조선의 상인들 사이에 교역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중강에서는 정부 공인하에 열리는 개시무역 대신 양국의 사상이 교역하는 후시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후 만상(灣商), 송상(松商) 등이 사행에 참여해 봉황성(鳳凰城) 책문(柵門)에서 밀무역을 행하던 후시무역[柵門後市]이 확대되면서 중강개시와 후시 모두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중강후시(中江後市)가 1701년(숙종 27)에 중단된 것과 달리 중강개시는 1882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기 전까지 유지됐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