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타지 설화」는 신라 진성여왕 때의 명궁(名弓) 거타지에 관한 문헌 설화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紀異篇) 제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居陀知條)」에 수록되어 있다. 용 구출 모티프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에 관한 내용인 「작제건 설화(作帝建說話)」와 유사하다. 이 설화는 영웅에 의한 악마(혹은 괴물) 퇴치 설화에 속하며, 서구의 「페르세우스(Perseus) 설화」와 비교가 가능하다. 또한, 「거타지 설화」는 당대 불교계와 나아가 나말여초 불교계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紀異篇) 제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居陀知條)」에 수록되어 있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인 아찬 양패(良貝)가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이때 거타지도 궁사로 뽑혀 따라갔다.
일행이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곡도(鵠島)에서 풍랑을 만났다.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자 “섬 안에 신령한 못이 있어 여기서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 하므로, 일행이 그 못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못물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남겨 두고 떠나면 순풍을 얻으리라.” 하였다.
양패가 섬에 남을 자를 가리기 위하여 각자의 이름을 적은 목간(木簡) 50쪽을 만들어 물에 넣고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라 쓴 목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거타지만을 남기고 모두 떠났다.
거타지가 홀로 섬에 남아 수심에 쌓여 있자 홀연히 한 노인이 못 가운데서 나오며 말하기를, 자기는 서해신[西海若]인데 매일 해가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다라니(陀羅尼)를 외며 못을 세 바퀴 돌면 자기와 가족들이 모두 물 위에 둥둥 뜨게 되고 그때마다 그 중이 자손들의 간(肝)을 하나씩 빼 먹어 지금은 자기 아내와 딸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다시 그 중이 나타날 것이니 그때에는 그를 활로 쏘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거타지가 쾌히 승낙하니 노인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거타지가 숨어서 그 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니, 과연 한 중이 내려와 주문을 외고 늙은 용의 간을 먹으려 하였다.
그 순간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을 맞히니, 중이 곧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노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거타지에게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고 하며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마리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 일행이 타고 가는 배를 뒤쫓아가 그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당나라에 도착하게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받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이를 아뢰니, 임금이 신라의 사신은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여겨 성대히 대접하고 후한 상까지 내렸다. 고국에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로 변한 노인의 딸을 다시 여자로 변하게 하여 그녀와 행복하게 살았다.
이 설화는 용의 구출을 모티프로 한다는 점에서,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 보이는 「작제건 설화」(作帝建說話)와 같은 계통이다. 「작제건 설화」에서 용 구출의 모티프는 항해 도중 풍랑이 사나워져서 점을 치니 고려 사람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하여, 작제건이 섬에 내린다. 섬에 내린 작제건에게 서해 용왕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부처의 모습을 한 자를 퇴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작제건이 노인을 해하려는 부처를 활로 쏘아 죽이니 그 부처가 늙은 여우로 변하였다. 그 뒤 용왕의 딸과 작제건이 혼인하여 함께 잘 살았다는 내용으로 「거타지설화」와 매우 비슷하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설화 유형 분류에 의거하면, 이 설화는 영웅에 의한 악마(혹은 괴물) 퇴치 설화에 속하며, 이 계통의 대표적인 서구 설화 「페르세우스(Perseus) 설화」와 비교가 가능하다. 또한, 「거타지 설화」는 당대 불교계와 나아가 나말여초 불교계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삼국유사』 「진성여대왕 거타지조」는 당대 사회적 · 정치적 관점에서 왕거인과 거타지를 각각 상층민과 지방 하층민으로 규정하여 진성여왕대 왕실에 대한 대내외적 반발의 상징이자, 거타지는 지방 토착 신앙 혹은 변질된 불교에 대비된 정통 불교 세력의 상징으로서, 나말여초 시기의 국가와 불교계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려초 불교계 재편 의의를 부각시키는 설화로 평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