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8년(혜공왕 14)에 조성되었는데, 현재의 소재지는 중국 뤄양(洛陽)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양경(揚憼)이 지었고, 그 전문(全文)이 나진옥(羅振玉)의 『석각사료신편(石刻史料新編)』 권15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에 실려 있다.
묘지에 의하면, 고진은 발해인(渤海人)이라 하였는데, 당시에 고구려는 이미 멸망하고 고구려를 잇는 나라로서 발해가 만주 동부지역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밝힌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할아버지는 장(藏), 즉 보장왕이고, 아버지는 연(連)이며, 맏아들은 간수(看秀)이다.
그는 773년 5월 27일 낙양 교업리(敎業里)에 있던 집에서 73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당나라에서 받은 마지막 벼슬은 개부의동삼사 공부상서 특진 우금오위대장군 안동도호담국공 상주국(開府儀同三司工部尙書特進右金吾衛大將軍安東都護郯上柱國)이었다.
부인은 그가 죽기 전 해인 772년 4월 12일 박릉군(博陵郡)에서 죽었다. 778년에 이르러 낙수(洛水)의 북쪽, 인산(印山)의 남쪽에 새로 마련된 묘지에 두 사람을 합장하고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