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관북 지방으로 부르는데, 이 지방에 있는 공업 지역이라 하여 관북공업지역이라 불린다. 민족 항일기에는 북선공업지대(北鮮工業地帶)라고 하였다. 1929년부전강발전소 건설 이래 광복 당시까지 비료·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 나라 제1의 중화학 공업 지대를 이루었다.
1940년의 공업 생산액을 살펴보면 함경남도 4억 3400만원, 함경북도 1억 7600만원으로 각각 우리 나라 전체 공업 생산액의 23. 2%와 9.4%를 차지하였다. 함경남북도를 합하면 우리 나라 공업 생산액의 약 3분의 1이나 된다. 같은 해의 인구를 보면 우리 나라 전체 인구의 7.7%를 함경남도, 4.5%를 함경북도가 차지하는데, 인구에 비하여 이 지방의 공업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만 하더라도 관북 지방은 한반도 총 공업 생산액의 6.4%(함경남도 4.3%, 함경북도 2.1%)를 차지하였으나,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0년부터 공업이 급성장, 1935년의 공업 생산액 비중이 21.4%(함경남도 16.0%, 함경북도 5. 4%), 1940년에는 32.6%(함경남도 23.2%, 함경북도 9.4%)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가 이 지역에 화학 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킨 것은, 첫째로 이곳 일대에 천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각종 자원을 수탈하여 군수 산업에 활용할 수 있고, 둘째로 이곳이 일본과 만주 동남부를 연결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길목이므로 자원의 결합이나 대륙진출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초만 하더라도 이 지방에 입지한 공장은 제재소·철공소·벽돌공장·양조공장 등이 대부분이고, 근대식 공장으로는 원산의 고무공장, 청진과 웅기의 통조림공장 등 소수의 공장만이 있었다.
그러나 1936년의 공장 명부를 보면 미쓰이(三井)계열의 오노타(小野田)시멘트공장을 비롯해서 노쿠치(野口)계열의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과 영안공장, 청진의 북선제유(北鮮製油) 및 어유비공장(魚油肥工場), 길주의 북선제지(北鮮製紙) 등 대규모의 공장이 많다.
그 밖에도 군사 기밀 관계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1940년까지는 홍남·성진·길주·청진을 중심으로 일본질소 혼미야공장(本宮工場), 일본마그네슘 금속공장, 조선질소 화약공장, 닛테쓰(日鐵) 및 미쓰비시광업(三菱鑛業)계열의 청진제철소 및 일본고주파 성진공장, 일본마그네사이트 화학공장 등 군수 산업과 연관된 각종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함경남북도 해안에는 군소 어유비공장이 무수히 들어서 있었는데, 정어리에서 뽑아낸 어유가 흥남질소 비료공장에서 니트로글리세린으로 가공되고, 이것이 군수품으로 이용되었다.
관북공업지역의 범위를 정확히 선을 긋기 어려우나 대체로 원산에서 웅기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형성되어 있고 그 중심지는 공업의 중심핵으로 원산·문천·흥남·성진·청진 등이다. 원산에는 스미토모(住友)계열의 제련소 및 광산기계공장이 있고, 문천의 천내리에는 석회석의 매장이 풍부하여 1928년에 오노타시멘트공장이 건설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시멘트는 북한 및 만주에서 시공 중에 있었던 각종 토목사업, 특히 수력 발전댐 건설에 많이 공급되었다. 특히 흥남은 관북공업지역 최대의 공업 중심지이다.
조선 총독부의 특혜로 이름도 없던 사업가에서 일약 대재벌로 급성장한 노쿠치는 1929년에 자신의 계열 업체에 공급할 목적으로 부전강수력발전 약 20만㎾의 시설을 개발하였고, 이어서 장진강수력발전 약 33만㎾를 개발하였다.
이 밖에 허천강수력발전 22만㎾, 부령수력발전 2.7만㎾가 개발됨으로써 관북 지방 일대는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각종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지방의 수력 발전 개발과 직결되는 사업으로는 노쿠치콘체른의 흥남질소 비료공장을 들 수 있는데, 당시의 질소 비료 생산은 물을 전기 분해하여서 얻은 수소 생산 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전력이 많이 필요하였다. 당시의 흥남 및 그 주변에는 노쿠치 계열의 크고 작은 공장이 27개나 있었다.
성진에는 전금(電金)에 속하는 일본고주파 특수강공장 및 일본마그네사이트공장이 입지하여 역시 전력 의존형 공업이 발달하였는데, 원광(原鑛)마그네사이트는 부근의 단천과 길주에서 공급되었다. 마그네슘은 마그네사이트원광을 염화마그네슘으로 만들어 전기 분해함으로써 뽑아낼 수 있었으므로 전력 소비가 컸다.
청진은 일본과 만주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미쓰비시광업과 일본 제철이 이곳에 철강공장을 건설한 것은 단천·이원·무산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무산의 철광은 비록 품위가 낮으나 그 막대한 매장량을 특수시설(Krupp’s ReNN, 回轉爐)을 통해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밖에 청진에는 만주에서 생산된 대두(大豆)를 짜는 공장인 북선산업(北鮮産業)이 있었고, 정어리 기름과 어박(魚粕)·어량(魚糧)을 가공하는 조선유지(朝鮮油脂)가 있었다.
이 밖에도 길주의 북선제지, 부령의 카바이드, 영안과 아오지의 인조석유, 고무산(古茂山)의 시멘트 등이 가동중이거나 계획 중에 있었다. 관북 안의 작은 어항들에는 모두 648개의 어유공장이 들어설 정도로 한때 정어리 어획과 어유공장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관북 지방의 노동력 공급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서 남부 지방보다는 크게 불리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노동 지향적인 섬유공업은 적합하지 않았다.
다만, 기후상으로 보아 아마와 대마의 재배가 갑산·풍산을 중심으로 성하여 제국제마주식회사(帝國製麻株式會社)가 이곳에 아마유공장 및 마직공장을 건설한 바 있다.
이 밖에 함흥의 제사 공장은 일본의 생사 재벌인 카타쿠라(片倉)가 서울·대구·전주 등지에 건설한 그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함경북도 영안과 아오지에 건설된 인조석유공장은 역시 군수 산업의 일환으로 노쿠치콘체른이 일본 해군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것이다.
이것은 함흥·온성·경원·경흥·회령·경성·길주·명천 등에 매장된 약 3억 6300만톤의 갈탄을 저온건류(低溫乾溜)하여 휘발성 화합물과 고체 잔류물을 분리시켜 원유를 대용하고자 꾀한 사업이었다.
이와 같이, 관북 지방의 공업은 자본으로 보아 노쿠치콘체른이 주축이고, 전력을 비롯한 철광·마그네사이트·갈탄·석회석 등의 지하 자원 및 삼림·수산 자원 등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자원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전력을 중심으로 결합 관계를 맺고 있어 각지의 공업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 일본 군국주의의 군수 산업 편제 및 일본∼만주를 연결하는 군사 계획 등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 곧 관북공업지역이다.
군국주의 일본은 관북 지방이 일본의 호쿠리쿠(北陸)지방의 조건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였던 것이다. 즉, 수력이 풍부하고 지하 자원·삼림 자원·수산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의 호쿠리쿠 지방과 연결되는 우리 나라의 관북을 유사한 성격의 공업 지역, 즉 전기 화학 및 전기 금속 공업이 주축인 군수 산업 기지로 조성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관북 삼항(關北三港)이란 웅기·나진·청진을 말하는데, 일본은 이들 항구 도시를 발판으로 도가선(圖佳線 : 圖們∼佳木斯)·경도선(京圖線 : 圖們∼長春)·조개선(朝開線 : 朝陽川∼上三峰) 등을 동북 만주로 연결함으로써 일본에서 대륙에 이르는 지름길로 삼았던 것이다.
광복 이후 관북공업지역의 변모를 정확히 살필 수는 없으나 이북5도청이 간행한 자료에 따르면 청진 및 그 주변, 원산 및 그 주변에 새로운 금속·기계 공장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포와 회령에도 금속·기계 공장, 혜산에는 식품 및 화학 공장을 신설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