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남포·송림·승호리 등이 그 중심지인 공업지대이다. 민족 항일기에 서선공업지대(西鮮工業地帶)라 불렀는데, 광복 후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관서공업지역이라 고쳐 불러 관용어가 되었다.
민족 항일기의 기록을 보면 황해도의 해주·사리원·송림, 평안남도의 평양 및 진남포주변, 평안북도의 신의주 및 다사도(多獅島) 일대에 많은 공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북 지방에 비해서 공업의 역사가 오래일 뿐 아니라 공업의 구조도 어느 정도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관서 지방에 있었던 1910년 당시의 이른바 신식 공장을 보면, 해주와 사리원에 정미소가 각각 1개, 진남포와 평양에 정미소 3개, 양조장 1개, 인쇄소 3개, 자기공장 1개가 있었고 평양 교외의 대동군에 몇 개의 벽돌공장이 있었다.
또한 신의주에도 정미소·양조장·제재소 등이 있었다. 1915년의 공장 명부에는 평양과 의주에 염직공장·제사공장·비누공장·철공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종업원 1백 명을 넘는 공장으로는 용강의 벽돌공장, 진남포의 제련소 및 3개의 정미소, 평양의 연초공장뿐이었다.
1915년에서 1930년에 걸쳐 이 지방에 있었던 공장으로는 일본 미쓰이(三井)계열의 도요생사(東洋生絲) 사리원공장을 비롯해서 일본제철계열의 송림제철공장, 승호리와 천내리의 오노타(小野田)시멘트공장, 신의주의 오시제지공장(王子製紙工場) 등 일본 재벌의 본격적인 진출과 함께 생긴 공장들이다. 평양의 소규모 편직업(編織業) 및 고무공장은 대체로 민족 기업인에 의해서 창립, 운영되던 공장이 많았다.
일본이 한반도를 전시산업 체제로 개편하면서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지방에는 군수품과 관련된 각종 공업이 계획, 신설되었는데, 이들 공업은 그 지방에 부존된 자원 사정과 밀접히 연관된다.
우선, 동력으로 전력자원은 장진강수력발전소에서 15만V의 송전선으로 배전이 될 뿐 아니라 압록강수풍발전소에서 32만㎾, 그리고 당시의 계획으로는 강계수력발전소에서 20만㎾를 배전받도록 되어 있었다.
풍부한 전력을 배경으로 건설 중에 있거나 계획 중에 있었던 전력형공업(電力型工業)으로는 조선이연금속(朝鮮理硏金屬)의 진남포공장, 서선화학(西鮮化學)의 신의주공장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을 제련하던 곳이다.
광물자원으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의 금광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 생산된 금을 제련하는 제련소가 진남포와 해주에 있었다.
평안남도 북부탄전(北部炭田)과 평안남도 남부탄전(南部炭田)이 매장량 8억 톤의 고품위 무연탄 탄전이며, 탄층 하부에 석회석이 매장되어 있어서 연료 이외에 화학공업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규모는 작지만 안주탄전·봉산탄전도 관서 지방에 위치하고 있는데, 석탄과 석회석의 결합은 이 지방 시멘트·카바이드·석회질소공업의 기초가 되었다.
해주석회질소공장과 시멘트공장을 비롯해서 봉산의 아사노(淺野)시멘트공장, 평양의 데이코쿠산소(帝國酸素), 해주의 조선화약, 그리고 카바이드 및 인산석회를 생산하던 순천의 조선화학 등은 무연탄과 석회석 및 전력을 배경으로 건설된 일본 군수경기(軍需景氣)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철광석으로는 평안남도의 개천과 용흥을 비롯해서 황해도의 은율·하성·재령·황주 등지에 품위 52%의 갈철광 및 적철광이 부존되어 있다.
송림제철소는 이 지방의 철광자원을 활용하기 위하여 건설한 것이며, 조선시멘트계열이 해주에 시멘트공장 이외에 제강공장을 계획한 것도 이 지방의 양질 철광자원과 관계가 깊다.
이 밖에 평양과 신의주의 주물공장, 진남포의 광산기계공장, 해주의 기계공장 등이 1940년대 초에 존립하던 전략적 중공업 부문에 속한다.
황해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해당하는 신계·곡산 일대는 세계적인 중석산지로서, 이는 철광석과 더불어 특수강 생산에 유용한 전략 물자이며, 평양탄전의 탄층 하부에 매장된 반토혈암(礬土頁岩)은 알루미늄 성분이 40% 내외로서 경금속 및 내화용재로 이용되었다.
평안북도의 의주·강계·창성·삭주·구성·벽동·초산에는 인상흑연이 산출되고, 평양 부근의 고품위 고령토(高嶺土), 강계의 남정석(藍晶石), 황해도 해안의 규사 등 요업의 원료는 이 지방의 석회자원과 더불어 관서 지방의 공업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었다.
관서 지방은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농산 및 임산자원도 풍부한 곳이다. 소맥 생산은 황해도와 평안남도만으로 한반도 총생산의 약 2분의 1을 차지하였으며 사리원·진남포·평양에 제분공장이 많았다.
옥수수를 이용하여 전분을 추출하는 대규모 전분공장이 평양에 있었고, 사탕무를 원료로 하는 대규모 제당공장이 역시 평양에 들어서 평양은 가장 큰 경공업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압록강을 통하여 운반되는 목재는 신의주에서 집중, 제재되었고, 오시제지의 펄프공장 및 가네후치방적(鐘淵紡績)계열의 펄프공장도 신의주에 입지하였다. 수풍댐 건설로 원목의 하운(河運)이 불편하게 되자 제재공장은 만포선과 평북선(平北線)을 따라 신의주보다도 강의 상류 쪽으로 이동, 입지하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중화학 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관서 지방에는 식품·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 지방의 식품공업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고, 섬유공업으로는 1930년 이전에 입지한 사리원의 도요생사, 평양의 야마주생사(山十生絲), 그리고 1930년 이후에는 진남포에 중외산업계열의 조선방직·조면공장(繰綿工場), 경방계열의 평산·은율조면공장이 입지한 바 있다.
이어서 중외산업 계열의 조선방직은 황해도의 신천·사리원에 역시 조면공장을 건설하여 지방 원료의 확보에 노력했고, 가네후치방적계열은 광주·청주에 이어 평양에 인조섬유공장을 건설한 바 있다. 순수한 민족 계열로는 양말공장으로 알려진 삼공직조(三共織造)·대동직조(大同織造)가 있었고, 크고 작은 고무공장이 평양에만 수십 개가 있었다.
관서 지방의 공업지역 형성에 작용한 교통 조건의 구실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일제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군수산업 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선 경의선·만포선·평북선은 만주를 쉽게 연결할 뿐 아니라 관서 지방의 지하 및 삼림자원을 수탈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해주·진남포·신의주 역시 황해에서 만주로 통하는 주요 항구도시인데, 관북삼항(關北三港)이 웅기·나진·청진인 것처럼 이들은 만주와 중국 및 한반도를 연결하는 관서삼항(關西三港)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일제는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다사도를 공업항으로 개발하여 신의주와 다사도의 중간에 있는 양시(楊市)까지 포함한 대공업지역은 임해공업화(臨海工業化)할 가능성이 있었다.
1940년 공업 생산액으로 보면 황해도가 1억 2천 7백만원, 평안남도가 1억 6천 2백만원, 평안북도는 6천 3백만원으로서 각각 6.8%, 8.7%, 3.4%를 차지한다. 이것은 관서공업지역 전체로 보면 우리 나라 총생산액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며 같은 해 관북 지방의 32.6%에 비하면 훨씬 낮은 편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군수산업이 활발하게 발달하기 이전인 1925년에는 황해도 6.3%, 평안남도 12.1%, 평안북도 5.3%로서 관서공업지역의 비중은 도합 23.6%에 이른다. 즉, 1930년을 전환점으로 보는 군수산업시대 이전에는 경기·경상남도 지방에 이어 관서공업지역이 항시 다음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40년의 공업 구성을 보면, 황해도는 금속·화학·식품공업, 평안남도는 식품·화학·방직공업, 평안북도는 화학·식품공업이 중요하다.
1915년 이후 5년 간격의 상대적 공업 성장을 보면 황해도가 1930년 이후 계속 높은 상대적 성장을 나타내는 반면에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는 1930년 이전에는 상대적 성장이 촉진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상대적 성장이 둔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의 공업구조의 차이에 기인하는데, 황해도의 공업구조는 1930년 이후의 군수경기에 보다 유리하였음을 말하여준다.
광복 후 관서공업지역의 면모는 정확히 알 길 없으나 이북5도청이 간행한 자료에 따르면 박천(博川)에 방직 및 식품공장, 희천·구성과 강계에 금속·기계공장이 새로 배치되었고, 개성에도 화학·금속 및 기계·방직공장이 신설되었으며, 또한 평양에서 진남포, 평양에서 순천을 잇는 축은 가장 중요한 공업 중심지를 형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