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상북도 안동. 호는 성봉(性峯). 권태원(權泰源)의 맏아들로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였다. 부인 김세암(金世巖)과의 사이에 1남5녀를 두었다. 광복 이후 불모지였던 우리 나라 물리학계에 씨앗을 뿌려 오늘의 물리학계의 기반을 다져놓은 선구자적 학자이다.
1922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의 세이조고등학교[成城高等學校] 시절에 물리학 이외에 철학 및 종교에 관한 많은 책을 탐독하여 뒷날 물리학자로서는 드물게 문필에 능하여 많은 수필을 남겼다.
1930년 홋카이도제국대학(北海道帝国大学) 이학부 물리학과를 입학했고, 1934년에 귀국하여 개성에 구원광학연구소(久遠光學硏究所)를 설립하여 광학연구를 계속하였다. 1938년에 송도중학교(松都中學校), 1939년에 개성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부교수로 부임하면서 후진양성과 연구생활을 본격화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주로 광학 교육과 연구에 집중하였고, 한국전쟁 후 최초로 우주선 측정장치를 조립하였다. 1957년 영국 브리스톨대학(Bristol大學)에서 1년간 우주선 연구를 하고, 귀국 후 우주선을 쬔 핵건판(核乾板)에 대한 연구로 1961년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광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레이저 분광학연구와 국내 최초로 건립된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제작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74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 후 한국에너지연구소 상임고문으로 활약하며 후학들의 연구에 자문하였다.
1952년 한국물리학회 창립발기인으로 큰 공헌을 하였고, 1960년 학회장으로 피선되어 10년간 학회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학교에서는 1949년에 문리과대학 이학부장, 1954년에 대학원장서리, 1964년 문리과대학장을 지냈다.
물리학에 대한 기여로 1952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3년 태양활동극소기국제관측년(IQSY) 한국위원회위원장, 1966년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부회장, 한국과학자협회장, 1967년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한국위원회 과학부분위원장, 1969년 국제측지학 및 지구물리학 연합(IUGG) 한국위원회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논문은 「간섭 필터의 비교 연구」 외 수 편의 광학 분야 논문, 「서울 및 제주지방에서의 지자기 및 우주선의 일변화」 외 10여 편의 우주선 분야 논문, 기타 「1MeV사이클로트론의 빔집중」 등이 있다.
저서로는 『자연과학』우주·물질·생명·『자연과학개론』·『광학』·『일반물리학』·『현대물리학』, 그리고 『과학하는 심상』 등 저·편저의 대학교재 수 편과 수필집이 있다. 1963년 문화훈장, 1967년 과학기술상, 1973년 국민훈장모란장, 198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