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주구토기(注口土器)’라고도 한다. 귀때란 안에 담긴 액체를 따를 수 있도록 그릇 입술의 한 쪽을 삐죽이 내밀게 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귀때가 달려 있는 토기는 신석기·원삼국시대와 백제시대에 나타난다.
신석기시대의 것으로는 이른 시기의 유적인 부산 동삼동·영선동패총에서 출토되었다. 영선동의 귀때토기는 N자형의 덧무늬〔隆起文〕또는 짧은 생선뼈무늬〔魚骨文〕가 아가리에 시문된 둥근 바닥의 사발〔碗〕로 입술 바로 아래에 작고 짧은 귀때가 내밀어져 있다. 동삼동패총의 목도기(牧島期)에서 출토된 귀때토기는 영선동의 것과 형태는 같으나, 단지 무늬가 없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들 귀때는 토기 안쪽에서 기벽을 밖으로 밀어내어 만들어졌다.
원삼국시대에도 귀때토기가 사용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남원시 세전리의 집자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로 편년되는 완주 상운리유적에서도 귀때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백제의 귀때토기는 바리〔鉢〕와 주기(注器)의 형태가 있다. 바리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형태가 바가지와 비슷하며 황갈색의 와질(瓦質)이다. 주기는 어깨가 넓고 납작바닥을 가진 몸통에 꼭대기는 보주형(寶珠形) 꼭지로 장식한 특이한 형태의 그릇이다. 신석기시대 토기와는 달리 어깨부분에 귀때가 내밀어져 있는데, 귀때가 한 쪽에 있는 것과 양 쪽에 있는 것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회색토기로 정선된 바탕흙으로 빚었다.
이러한 백제시대의 귀때토기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도 있어 주전자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석기시대와 백제의 귀때토기는 시간상·형태상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양자는 상호관계가 없는 별개의 토기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