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라는 명칭은 널리 알려진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화첩이 포함하는 지역은 4개 군(郡)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平海) 월송정(越松亭)에서 북으로 안변(安邊) 가학정(駕鶴亭), 그리고 금강산 접경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사군첩(四郡帖)’이라는 명칭보다는 ‘김홍도필 금강산화첩(金弘道筆 金剛山畵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조선시대에는 ‘해산첩(海山帖)’이라고도 불렀다.
이 금강산화첩은 김홍도가 44세 때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다닌 금강산 및 관동8경 지역을 그린 것이다. 김홍도는 여행에서 그려 온 초본(草本)에 의거해 채색횡권본(彩色橫卷本)과 화첩본(畵帖本, 5권 70폭) 두 가지를 정조에게 진상했다.
그 중 횡권본은 정조가 이덕무(李德懋)와 서유구(徐有榘) 등 신하들에게 보여 주며 제화시(題畵詩)를 짓게 하기도 했으나 그 후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화첩본은 순조가 1809년(순조 9) 매제인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에게 하사하였다. 홍현주의 수장품은 나중에 아들 홍우철(洪祐喆)에게 전해졌으나 그 이후의 전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이 화첩의 제작경위와 전래상황 등에 대해서는 강세황(姜世晃)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와 「송김찰방홍도김찰방응환서(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서유본(徐有本)의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홍현주의 형인 홍석주(洪奭周)와 홍길주(洪吉周)의 문집 등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동주(李東州)의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나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을 통해 ‘금강사군첩’으로 소개된 60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은 김홍도의 진작(眞作)이 아닌 임모작(臨模作 : 글씨나 그림 따위를 본을 보고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린 작품)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화풍상 두 사람의 필치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폭 금강산화첩은 뛰어난 화가가 정밀하게 임모하였기 때문에 김홍도 원작의 구도를 완벽히 보존하고 있고 화풍상의 특징도 상당히 잘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김홍도의 금강산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60폭 금강산화첩 외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40폭 금강산화첩이 전한다. 또 김홍도의 금강산화첩을 임모한 수많은 작품들이 전하고 있어 김홍도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잘 보여 준다. 강세황의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중 몇 폭, 이의성(李義聲)의 『해산첩(海山帖)』, 이풍익(李豊翼)의 『동유첩(東遊帖)』, 필자미상(筆者未詳)의 『금강와유첩(金剛臥遊帖)』,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과 『해산도권(海山圖卷)』 등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들을 상호 비교하여 검토해 보면, 김홍도의 여정과 당시에 그렸던 금강산도의 내용을 복원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김홍도의 여정은 한양(漢陽)→영동 9군(嶺東 9郡)→진양(淮陽)→내금강(內金剛)→외금강(外金剛)→회양(淮陽)→한양이었고, 당시 경치를 그린 75곳 이상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강세황의 「유금강산기」에 의하면 김홍도와 김응환은 당시 각자 1백여 폭의 초본을 그렸다고 한다. 이들 내용은 장차 김홍도의 금강산도와 임모작들이 더 밝혀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홍도의 금강산화첩 제작은 그가 생애의 후기에 개성적이고 한국적인 산수화풍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전에 있어서 정점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