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선조 5) 작. 비단 바탕에 담채. 세로 46.5㎝, 가로 38.3㎝. 이 작품은 현재 제목(題目) 1폭, 그림 2폭, 좌목(座目) 2폭으로 구성된 5폭의 화첩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계회축 형식(契會軸 形式)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원래는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라는 6자(字)로 된 전서(篆書) 제목(題目)이 상단에, 2폭으로 나누어진 그림이 중단에, 역시 2폭으로 나누어진 좌목(座目)이 하단에 위치하였다.
이 작품은 1572년 10월 11일 명(明)의 조사(詔使)가 신종(神宗, 1563-1620)의 등극(登極)을 조선에 알리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있던 의순관(義順館)에 도착하던 때의 광경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압록강이 흐르고 있고, 우반부에는 의주성(義州城)과 의순관이, 대안(對岸)인 좌반부에는 중국 산천이 그려져 있다. 중국 사신 일행은 좌측에서 강을 건너 가마와 기마 행렬을 이루며 우측 의순관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의순관 앞에서는 원접사(遠接使) 일행이 몸을 굽혀 맞이하고 있다. 압록강 건너 중앙부(현재 좌우로 갈라짐)에 마이산(馬耳山)이, 그 왼쪽 산 밑에는 희미하게 구련성(九連城)이 일부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등장 인물들은 작게 그려져 신분이나 행위를 시사하는 정도이고 구체적 개성은 표현되지 않았다.
반면 산수 배경은 아주 넓게 부감(俯瞰)하여 조선 초기 기록화나 계회도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원산(遠山)을 묘사한 방식은 안견파(安堅派) 화풍(畵風)의 한 변형으로 16세기 전반부터 크게 유행한 단선점준(短線點皴)이 뚜렷하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와 유사하다.
의순관 주변의 실경(實景)을 비교적 충실하게 묘사한 점, 행사의 인원과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점에서 조선 초기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이자 기록화, 풍속화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한편 좌목에는 당시 원접사(遠接使)였던 정유길(鄭惟吉) · 정유일(鄭惟一) · 유성룡(柳成龍) 등 65명의 관직 · 성명 ·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