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화 ()

북새선은도 / 계화 / 한시각
북새선은도 / 계화 / 한시각
회화
개념
자[계척]를 이용하여 궁궐 · 누각 · 가옥 등 건축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그림 또는 그 화법. 누각화 · 궁실화.
이칭
이칭
누각화(樓閣畵), 궁실화(宫室畵)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계화는 자를 이용하여 궁궐·누각·가옥 등 건축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그림 또는 그 화법이다. 누각화·궁실화라고도 한다. 전통적인 동양 회화의 한 분야로, 주로 왕실에서 일하는 화원들이 그렸다. 동양의 전통적 목조건축은 복잡한 구조라서 자로 제도하듯 표현하는 그림이 생겼다. 또 동양의 그림은 전통적으로 왕조·국가를 위한 목적이 컸으므로 궁궐·누각 등이 중요 주제가 되었다. 대표적인 계화로는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동궐도? 2점이 있다. 이 작품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모를 큰 화면에 그린, 조선 시대 계화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정의
자[계척]를 이용하여 궁궐 · 누각 · 가옥 등 건축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그림 또는 그 화법. 누각화 · 궁실화.
개설

계화는 전통적으로 동양회화의 한 분야로 우리나라에서는 ‘누각(樓閣)’, 중국에서는 ‘궁실(宫室)’, ‘옥목(屋木)’, ‘계화누대(界画樓臺)’ 등으로도 불렸다. 계화의 이런 다른 명칭들은 주로 건축과 관련된 것인데, 모두 그림의 분야를 논하는 문맥 속에 있기 때문에 뒤에 ‘화(畵)’자가 생략된 것이다.

건축, 특히 동양의 전통적 목조건축은 기둥 · 창방 · 공포 · 기와 등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전문적 기술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를 이용하여 정밀하게 제도하듯 표현하는 그림이 생긴 것이다. 또 동양의 그림은 전통적으로 왕조나 국가를 위한 목적이 컸으므로 궁궐 · 누각 등이 중요 주제가 된 것이며, 계화는 주로 궁정에 봉사하는 화원들이 그렸다.

연원 및 변천

계화는 중국에서 먼저 발달했다. 동진 고개지(顧愷之)의 저서로 알려진 『논화(論畵)』에 “건물은 일정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그리기는 어려우나 좋아하기는 쉽다. 그러나 생각을 옮겨 재창조하는 예술적 과정은 필요없다(臺榭一定器耳 難成而易好 不待遷想妙得也).”라고 하여 계화의 특징을 지적한 글이 보인다.

이후 점차 발전하여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志)』 「잡화편」에 계화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또한 송대 계화의 명수 곽충서(郭忠恕)의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는 동시기의 대표적 계화 작품이다.

원나라 이후 문인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정밀한 묘사력이 필요한 계화는 13화과(畵科)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청대까지 직업화가들에 의해 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명 · 청대에도 궁궐이나 건축물 그림에 대한 수요가 궁정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뛰어난 계화의 전통은 유지되었다.

우리나라 계화의 역사는 중국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소재 · 형식 등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는 계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성곽도, 건물도로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화엄경 단편에 누각도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계화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화가 더욱 발전한 것은 중국 송나라와 긴밀하게 교류한 고려시대라고 생각된다. 비록 작품은 전하지 않으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 이녕(李寧)이 그렸다고 전하는 「천수사 남문도(天壽寺南門圖)」에도 계화 기법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녕은 1124년(인종 2) 북송에 가서 휘종(徽宗)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하므로, 그의 화풍은 곽충서가 활약한 북송대와 유사하였을 것이며, 「천수사 남문도」는 치밀하고 정확한 묘사로 이루어진 계화 양식의 일단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이녕보다 훨씬 후대에 그려진 고려 불화에 치밀한 계화 양식으로 그려진 궁궐 누각도가 다수 등장하기 때문이다.

내용

조선 초기에도 고려의 계화 전통이 이어졌으나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안견이 밑그림을 그린 『삼강행실도』의 판화에는 많은 건축물이 그려져 있어 참고할 만하다. 임진왜란 이전의 그림 중 계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궁중숭불도(宮中崇佛圖)」이다. 16세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는 회랑으로 연결된 많은 건물들의 모습이 평행사선부감법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전기 계화의 전통이 궁중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은 그 동안 축적된 문화유산을 거의 소실시켜 버렸다. 인조숙종대에 중국으로부터의 새로운 문물의 수입, 자체의 복구 노력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회화적 역량은 한동안 조선 전기를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보여 주는 것이 당시의 뛰어난 화원 한시각(韓時覺)이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이다. 이 작품에 그려진 관아 건물의 모습은 「궁중숭불도」와 비교할 때 건축물의 세부나 구조 등 여러 점에서 허점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영조 · 정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정치 · 경제적 안정과 문화 발전에 힘입어 계화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정조대는 조선 후기 문화 발전의 정점을 이룬 시기였으며, 계화와 관련해서는 1783년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제도를 설치하고 그 녹취재(綠取才)의 8개 기본 화문(畵門) 중 ‘누각(樓閣)’을 신설한 것이 중요하다.

즉 전통적으로 도화서 화원 시험에 포함되지 않았던 계화가 차비대령화원 녹취재 과목으로 채택된 것이 그 발전의 주요 동인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런 추세는 조선 후기에 계화로 그려진 건물도가 수록된 각종 의궤의 간행이 활발해진 것과도 유관하다. 또 궁중행사도에도 계화로 그려진 건축물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정조대 이런 계화 발달의 배후에는 당시 최고의 화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경)의 역할이 있었다. 즉 김홍도는 서양화법을 가장 잘 습득하여 계화에 응용한 화가였다. 김홍도가 서양화법에 능통했음은 당대 크게 유행한 책가도(冊架圖)의 명수였던 점에서 잘 드러난다. 책가도에는 투시도법과 음영법, 진한 채색 등 서양화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김홍도가 주관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판화에는 전에 없던 능숙한 투시도법에 의거한 건물의 계화가 보인다. 김홍도가 밑그림을 그린 목판화 평양도병풍의 유행도 이런 점을 지지해 준다.

계화 발전의 배경에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처럼 정교한 궁정판화가 수록된 중국 서적의 수입도 한몫했을 것이다. 정조대 계화 발전의 결과가 잘 반영된 것이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 두 점이다. 창덕궁창경궁의 전모를 큰 화면에 평행사선부감시로 그린 이 작품은 조선시대 계화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이 밖에 「태평성시도」(병풍), 「경기감영도」(병풍) 등도 계화의 좋은 예이다.

참고문헌

「계화 기법을 계승한 원강(袁江)의 누각산수 연구」(정은주,『중국사연구』, 중국사학회, 2016)
「조선시대 판화와 관련 화가에 대한 일고찰」(진준현, 『미술사연구』 28, 미술사연구회, 2014)
「19세기 궁궐 계화와 〈동궐도〉의 건축 표현」(박정혜, 『동궐』, 동아대학교 박물관, 2012)
「18∼19세기 기성도 병풍 연구」(박정애, 『고문화』 74, 대학박물관협회, 2009)
「한국의 궁궐도」(안휘준, 『동궐도』, 문화재관리국, 199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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