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초문답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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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초문답도(홍득구 작)
어초문답도(홍득구 작)
회화
개념
어부와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회화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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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어부와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회화작품.
내용

어부와 나무꾼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夫辭)」, 강태공(姜太公)이나 엄자릉(嚴子陵)의 고사(故事) 등에서 보듯이 은일자로 많이 비유되었다. 그것은 어부와 나무꾼이 세속적인 시정(市井)이 아니라 산과 강, 즉 자연에 파묻혀 생활하는 특성에서 기인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있는 어초문답도는 숙종(肅宗, 재위1674-1720)연간인 17세기 말경에서 18세기 초엽부터 확인된다. 어초문답도를 그린 화가는 문인화가 홍득구(洪得龜, 1653-1703?), 숙종이 특히 아꼈던 화원화가 이명욱(李明郁, ?-1713년 이전)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또 필자미상의 작품으로 1715년 숙종의 어제(御製)가 적힌 작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에도 정선(鄭敾, 1676-1759)과 이인상(李麟祥, 1710-1760), 그리고 근대의 화가 지운영(池雲英, 1852-1935), 이한복(李漢福, 1897-1943년 이후)의 작품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작품들 중 홍득구와 이명욱의 작품은 구도, 소재면에서 아주 유사하여 당시에 하나의 도상(圖像)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1715년 숙종어제가 있는 어초문답도는 화려한 채색이 가해진 원체화풍의 작품으로 당시 궁중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 바 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도 송대의 성리학자를 비롯한 고사인물화를 즐겨 그렸는데, 그가 그린 「어초문답도」는 숲에서 어부와 나무꾼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으로 숙종대의 작품과는 성격상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 후대의 이인상, 지운영, 이한복 등에서 보듯이 이후에도 어초문답이라는 소재는 꾸준히 그려졌으나 형식상 일관성을 보이지 않고 다양하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그려진 어초문답도는 당시의 시대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띠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송대의 성리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어초문대(漁樵問對)』가 특히 주목된다. 이 책은 어부와 나무꾼이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저자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데, 17세기 서울경기지역 서인(西人)들의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연구되어 있다. 숙종대에는 1714년(숙종 40)에 소옹을 비롯한 비롯 송조(宋朝) 육현(六賢)을 문묘 대성전에 배향한 사실도 당시 이 책이 주목되었던 것과 유관하다고 생각된다. 이밖에도 소식의 『어초한화록(漁樵閑話錄)』이나 다른 문헌, 그리고 도가사상, 은일사상 등과도 관련성이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소옹고사도의 유형과 표상」(송희경,『석당논총』,49집, 20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숙종어제어초문답도」의 도상과 성격」(장진아,『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유물도록』14집, 2006)
「17세기 중후반 서울경기지역 서인들의 경세학과 정책이념」(조성산,『한국사학보』21, 2005)
「어초문답과 어초문답도의 문화담론 고찰-가곡 가집 『시가』의 문화도상 탐색의 일환으로」(성무경,『시문연구』32권1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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