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익지(益之). 화원으로 교수를 지낸 한시각(韓時覺)의 사위이다. 그 역시 도화서(圖畫署)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으며, 이징(李澄)과 맹영광(孟永光) 이후의 제일인자라 일컬어졌다.
숙종은 그를 몹시 아껴 ‘李明郁’ 3자의 도장과 ‘續虛舟筆意(속허주필의)’ 5자의 도장을 특별히 하사하였고, ‘續樂癡生筆意(속낙의생필의)’라는 도장을 다시 새겨주려 하였으나 그가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악치(樂癡)란 1645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맹영광(孟永光)의 호로, 이명욱이 말년에 맹영광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화풍과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유작으로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간송미술관 소장) 한 점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북송(北宋)의 유학자 소옹(邵雍)의 『어초문대(漁樵問對)』와 소식(蘇軾)의 『어초한화(漁樵閑話)』의 내용을 근간으로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서 천리(天理)에 따라 살아가는 어부와 초부가 대화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어부와 나무꾼을 소재로 한 이 그림은 그의 뛰어난 기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는 부분적으로 1645년에 내조하였던 중국인 화가 맹영광의 공필화법(工筆畫法)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음영법을 구사하여 정밀하게 묘사한 안면묘사라든가, 능숙하게 처리된 바람에 나부끼는 옷의 주름, 그리고 대각선적 구도를 이용한 효율적이고 변화 있는 포치(布置) 등이 자아내는 생동감 넘치는 화면과 전체적인 격조는 그의 뛰어난 화기(畫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