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징(子徵), 호는 창곡(蒼谷)이다. 영의정 홍명하(洪命夏)의 손자로서,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은 금부도사(禁府都事), 현감(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홍득구는 문과에 합격하지 못한 가운데 양반 자제들에게 무술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관직에 제수되었고(1685), 이후 금부도사, 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근무가 태만하다든지, 병 때문에 상경(上京)하여 임지(任地)를 오래 비우는 등의 일이 보고된 것을 보아 관직에 큰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보다 서화(書畵)에 탐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원별집(畵苑別集)』에 홍득구의 「논화격(論畵格)」이라는 짧은 글이 필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필법 및 묵법의 종류가 열거되었고 화법의 수준에는 화도(畵道), 화학(畵學), 화식(畵識), 화공(畵工), 화재(畵才) 등의 단계가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가 이론도 겸비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세걸 회화와의 친연성과 활동시기로 보아, 평양에서 상경(上京)하여 화명(畵名)을 떨치고 있던 조세걸과의 교유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홍득구의 작품으로는 산수인물화가 주로 전해지는데 『화원별집』 중의 「연강연도도(煙江延棹圖)」와 「거암수조도(據巖垂釣圖)」는 나무 아래에 인물이 배치된 소경산수인물화로서 간략한 구도에 거친 필치를 구사한 절파화풍의 작품이다. 홍득구가 ‘옛날 법을 배우지 않고 자기 식대로 그리고 한 폭으로 된 소경(小景) 그리기를 좋아하여 대강대강 그려냈으니’라고 한 윤두서(尹斗緖)의 화평(『화단(畵斷)』)에 상응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옹범주도(漁翁泛舟圖)」(1692, 삼성미술관 리움)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노젓는 어부를 그린 그림으로 이만부가 이른 바 ‘바람 불고 안개 낀 정각(亭閣)’을 그렸으며 ‘필법이 기일(奇逸)’하다고 한 표현이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홍운당첩(烘雲堂帖)』 중의 홍득구의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경남대학교박물관)는 『고씨화보(顧氏畵譜)』 중의 구영(仇英)의 그림을 방(倣)한 것으로, 조세걸의 「어주대월도(漁舟戴月圖)」(간송미술관)와도 유사하여 두 사람이 함께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를 감상하고 학습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