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감의 본관은 금산(錦山), 자는 중허(仲虚), 호는 석곡(石谷) 또는 입택(笠澤)이다. 지금주사(知錦州事) 김신(金供)의 후손이다. 아버지 김성원(金聲遠)과 어머니 해주오씨(海州吳氏) 사이에서 1566년 11월 2일 전라남도 곡성 오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경전을 통독하고 역사책을 두루 읽었다. 1588년(선조 22)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612년(광해군 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평안도 어사를 거쳐 경상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양남(兩南) 제독(提督)을 지낸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반구정(伴鶴亭)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淳) 등과 의병 500여 명을 모집하여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해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분의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그는 돌아가지 않고 한양으로 갔다. 국왕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의 의례를 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8년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1644년(인조 22)에는 김해부사를 역임하였다. 문장으로 명망을 얻었다. 1641년 5월 25일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竹谷面) 서정자리(西亭子里)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02년(광무 6) 후손 김상수(金祥銖) 등이 김감의 유문을 여러 서적에서 수습 · 정리하고, 김영한(金甯漢)과 조원승(曺元承) 등에게 서문을 받아 문집 『입택집(笠澤集)』을 간행하였다. 『입택집』에는 김감이 1617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올 때의 일들을 기록한 「조천일기(朝天日記)」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