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숙(公叔), 호는 성당(惺堂). 한말에 법부 주사와 검사를 거쳐 중추원 촉탁을 지냈다. 1919년 서화협회(書畫協會) 창립 때 13인의 발기인 중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1921년에는 제4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23년의 제2회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부터는 서부(書部)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글씨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오체(五體)를 모두 잘 썼으나, 특히 안진경(顔眞卿)과 황정견체(黃庭堅體)의 해서에 뛰어났다. 팔분체(八分體)의 오른쪽이 올라가는 예서에서 자유분방하고 변화가 많은 자신의 서품을 이룩하였으나, 격조면에서는 황정견체의 해서·행서에 미치지 못하였다.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대표적인 작품들을 많이 출품하였으며, 과천의 「문간공한장석묘갈(文簡公韓章錫墓碣)」을 비롯하여 많은 금석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서의 연원」과 「서도연구의 요점」 등의 이론적 글을 통하여 서예전통의 계승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서법연구기관으로 ‘상서회(尙書會)’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당시 서예계의 대표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훗날 그가 끼친 영향이 정통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대표작으로 안진경체의 해서로 쓴 「출사표(出師表)」와 황정견체의 해서로 쓴 「장진주(將進酒)」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