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

정치
인물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자,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김일성의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기여한 관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
1947년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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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자,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김일성의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기여한 관료.
개설

평안남도 안주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1921년평양대성학원(大成學院) 보통과 4학년에 편입하여 1922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23년 만주로 건너가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조선공산청년회 만주지회, 1927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참가하였다. 1929년용정(龍井)동흥중학(東興中學)에 다녔고, 193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노동자구락부에서 근무하였다.

1930년 11월 코민테른 동양부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1932년 5월 졸업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평양에서 목공(木工)·전기공의 신분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적색노동조합 등의 지하공작을 전개하였고, 1935년 3월 주영하(朱寧河)와 함께 평양지방좌익노동조합 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해 노력하다 같은 해 9월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38년 출옥 후 평양·경성·흥남 등지에서 목공·철공(鐵工)·전기공으로 노동자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만주로 탈출하였다. 만주에서 조직활동중 재차 체포되어 8·15광복까지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광복 후 소련군 정치부에 관계하였고, 조선공산당 평남도당 조직부장, 평남도당 책임비서를 거쳐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946년 9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된 후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광복 직후 김일성(金日成)이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데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 가운데 1인으로 북한 조선노동당 창세기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북로당 중앙검열위원장으로 활동하던중 1947년 9월 7일 병사하여, 사회장(장의위원장:朱寧河)으로 모란봉묘지에 묻혔다. 북한 당국은 그를 기려 1951년 평양에 김용범혁명유자녀초등학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로동신문』(1946.10.22.)
『강원로동신문』(194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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