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 출신. 소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일진회원(一進會員)을 비롯한 매국노들의 망국행위에 분개, 1908년 3월 배일운동을 계획하였다.
1909년 10월 이재명(李在明)·이동수(李東秀)·김정익(金貞益) 등과 친일파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濬) 등 3인을 처단하기로 계획, 거사에 필요한 권총을 제공하는 등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해 11월 이재명의 거사 이후 곧 일본경찰에 붙잡혀 1910년 5월 18일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인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의용단에 가입,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