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덕천 출신이다. 1921년 8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군자금 모집부장 및 대한독립자유회(大韓獨立自由會) 회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김일봉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의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일본인 및 친일파를 숙청하고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에 참가했다. 1924년 5월에는 신대한자유회(新大韓自由會)에 소속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판결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2월에는 김일봉의 처소에서 변낙규·장인준(張仁俊)·유영규(劉永奎) 등과 무명(無名)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변낙규를 총사령으로 추대했다. 김일봉은 모험대 책임자로 활동했다.
김일봉은 비밀단체를 조직한 직후인 12월 27일 연변군 자작리에 큰 도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인준·박봉수와 함께 습격할 것을 공모했으나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1933년에는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해 활동했다. 국민부는 1929년 4월 지린[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이 연합하여 조직한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국민부원이 되어 조카인 장인준과 함께 영변의 용연동에서 개량서숙을 운영하면서, 1933년 2월 4일에는 장인준과 함께 평북 덕천(德川) 왕택준(王澤俊)에게서 100여 원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덕천서(德川署)에서 이 사실을 알고 2월 8일 용연동 개량서숙에 와서 김일봉·장인준을 체포하고 가택을 수색했다. 수색 도중에 폭발물이 나오자 황급히 폭약을 빼앗아 입에 넣어 자폭, 순국했다.
1995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