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 출신. 정환직(鄭煥直)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1907년 9월 입암(立巖)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순국하자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이 되었다.
김일원은 정환직의 휘하에서 청송의 보현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영덕·흥해·영천·경주·의흥 일대에서 일군을 격파하며 의세를 떨쳤다. 1907년 10월에는 흥해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고 소장 이찌바라[市原爲太郞] 등을 총검으로 처단하였다.
그리고 우편취급소에 보관한 300여 원을 노획하고 경무분파소 및 근처에 있는 13동의 집을 방화하였다. 같은 해 11월 3일에는 신령읍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 100여 정을 탈취하고 경무분파소 및 순검 박재진(朴在鎭)의 집을 방화하였다.
다음 날에는 흥해읍에 들어가 역시 경무분파소를 습격하여 총 수백 정을 노획하고 분파소 및 주택 3동을 불태웠다. 11월 15일에는 다시 흥해읍에 들어가서 순검 정영필(鄭永弼) 등 친일 순사를 처단하고 군청과 기타 가옥을 소각하였다.
다음 날에는 청도읍에 들어가 순검 김학윤(金學潤)의 의복과 기타 금품을 노획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피체되어 1910년 9월 20일에 대구공소원에서 동지 김수곡(金水谷)등과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