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정연(金正淵), 호는 진혼(震魂). 평안북도 용천 출신.
향리의 오암서원(梧巖書院)에서 7년간 한학을 배운 뒤,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전문학교 재학 중 항일 활동을 한 혐의로 여러 차례 구금된 일이 있다. 그 뒤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와 숭실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태형(笞刑) 90도를 선고받았다.
1919년 8월 전라남도 광주로 옮겨 숭일학교(崇一學校)에서 회계원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원(扶韓靑年團員)인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 등과 함께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과 연락을 맺으면서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구형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 나왔다.
그 뒤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북경 등지를 거쳐 산시성 타이위안부(山西省太原府)로 가서 안창남(安昌男)·이용화(李容華)·정동석(鄭東錫)·노중현(盧仲鉉)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의 공명단(共鳴團)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일본의 밀정에게 붙잡혀 징역 2년6월형을 언도받고 톈진[天津]의 일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비행사 안창남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기금 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공명단장 최양옥, 단원 이선구(李善九)와 함께 1929년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한 뒤 서울 교외 망우리 근처에서 일본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은 뒤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으나, 이들을 추격한 일본 경찰과 1주일 여의 항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 때문에 김정련은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62년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