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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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인물
해방 이후 조선나전칠기공예조합의 이사장, 대한공예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공예가. 사업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72년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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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조선나전칠기공예조합의 이사장, 대한공예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공예가. 사업가.
내용

본관은 김해. 서울에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배재학당을 거쳐 이왕직(李王職) 미술품제작소에 입소하여 칠공부에서 장기명(張基命) 등과 함께 나전칠기의 전통적 기예를 익혔다.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공예부가 신설된 1932년(제11회)부터 1937년 사이에 연이어 여섯 차례 입선 및 특선(제14회)하였고, 1942년에 또다시 입선하였다.

1946년 조선나전칠기공예조합의 부이사장 및 이사장과 대한공예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나전칠기의 산업화에 노력하는 한편, 나전칠기의 품격 향상을 위한 작품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1949년도 서울시문화상 공예상을 수상하였다.

한국미술가협회·공예작가동인전의 창립회원(1955),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추천·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국전에서는 제2회(1953) 때부터 7년 동안 계속 심사위원을 역임, 제3∼8회에 걸쳐 여섯 차례 출품하면서 이순석(李順石)과 함께 초기 국전공예부를 주도하였다.

그의 초기작품에서는 전통적인 조선조 나전칠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한 장·탁자 등을 생활양식의 변모에 맞추어 의자생활에 적합한 가구로 개량한 노력이 보이며, 1950년대 국전작품에서는 기형의 변화까지 시도하는 등 창작공예로서 나전칠기를 예술화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공예창작자로서 초기 국전을 주도하였다는 점보다는 약 40년 동안 서울에서 나전칠기공예제작소를 운영하면서 장인(匠人) 겸 사업가로서 나전칠기의 산업화를 통한 생활화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2세 대관식 축하로 정부가 보낸 「나전응접탁자」는 그의 작품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는 지병이 생겨 활동을 중단하고 제작소를 목칠공예가인 사위 백태원에게 넘겨주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미술연구(韓國近代美術硏究)』(이경성, 동화출판공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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