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위원 출신이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김창균은 1922년 백광운(白狂雲)의 지시를 받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진입했다. 강계(江界)의 청풍동(淸風洞)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과 교전했다.
이어서 의용군 제1중대 제2소대 제3분대장 김종호(金宗浩)의 인솔 아래 신영숙(申永淑)·현성희(玄成熙) 등과 함께 위원군 송면(宋面) 석포동(石浦洞)에서 밀정 송의봉(宋義鳳)을 처단했다. 그리고 강계의 별하(別河)에서 장명준(張明俊)의 가옥을 불태웠다.
1923년 음력 정월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에 가담해 활동했다. 그는 만주의 집안현(集安縣) 유수림자(柳樹林子) 두도구(頭道溝)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다. 그리고 소대장 참위(參尉) 전세웅(田世雄)의 부하로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군 어뢰면(漁雷面) 풍룡동(豊龍洞)에서 평북 경찰부 수색대와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김창균은 참의부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24년 5월 19일 아침 9시 경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는 소대장 참위 한웅권(韓雄權)의 지휘 아래, 국경을 순시하기 위해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중류인 강계군 마시탄(馬嘶灘)을 통과하는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저격했다.
김창균은 이 때 장창헌(張昌憲)·현성희(玄成熙)·김여하(金呂河)·이명근(李明根)·전창근(田昌根) 등과 함께 이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사이토를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독립운동계에 큰 용기를 주었으며,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24년 8월에는 역시 참의군 2중대 이두성(李斗星)의 지휘 아래 중대원 6명과 함께 위원군 화창면(和昌面)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 전투에서 동료 신용섭(申龍燮)이 전사했다. 그 후 황희운(黃稀雲)·배응도(裵應道) 등에게서 군자금을 징발했다. 그러나 1926년 9월 13일 참의부 제1중대 소대장으로 임무를 띠고 중국 유수림자에서 평북 위원군 서태면(西泰面) 신천동(新川洞)으로 건너오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7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개정되어 1928년 3월 14일 사형이 구형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11월 9일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즉위로 무기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