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북로군정서 산하 사관연성소 구대장, 황포군관학교 집훈처 교관 등을 역임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쓴 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20년 김훈은 북로군정서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2월 초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했는데 김훈은 구대장 직책을 맡았다.
이때 사관연성소 교장은 김좌진(金佐鎭), 교수부장에 나중소(羅仲昭), 교관에는 이장녕(李章寧) · 이범석(李範奭) · 김규식(金圭植)이 활동했다.
한편 1920년 9월 졸업한 사관연성소 제1기생 200명을 중심으로 교성대(敎成隊)가 조직되고 김훈은 소대장을 맡았다. 교성대 대장은 나중소였으며, 부관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은 이범석이었다. 소대장은 김훈 이외에 이민화(李敏華) · 이탁(李鐸) · 남익(南益)이었다.
1920년 10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서 북로군정서 사령부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이 청산리전투(청산리대첩)를 수행하기 위해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김훈은 북로군정서 사령부에 소속되어 제2연대 종군장교로서 이민화 · 백종열(白鍾烈) · 한건원(韓建源) 등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다.
10월 2일 김훈은 그의 중대원들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소좌 야스카와[安川]가 이끄는 부대와 교전하여 승리했다. 다음 날 삼도구의 만록구(萬鹿溝) 전투에서 일본군 시마다[島田]를 격퇴하고, 어랑촌(漁郞村)전투에서도 김훈은 중대원과 한건원(韓建源) 부대를 지휘하여 본대의 철수를 엄호했다.
1921년 2월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상해로 갔다.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200여 명이 참석해 이들에 대한 환영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훈은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의 전투상황과 전과를 알리고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했다. 아울러 무기와 인원이 부족해 퇴각한 것이 유감이라고 하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해 5월부터는 상해 임시정부 내 이동휘(李東輝) 계열인 노백린(盧伯麟)파에 소속되어 노태연(盧泰然) · 도인권(都寅權) 등과 함께 군사력 양성과 외교문제를 담당하면서 활동했다. 그 후 김훈은 곤명(昆明)으로 가 이름을 양주평이라 바꾸고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학하였다.
1923년 말 제18기생으로 졸업한 김훈은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서 집훈처 교관으로 무관 양성에 주력했다. 1927년 이후 북만주로 옮겨 항일전을 수행했으며 1938년 경에 전사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976)
-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 『朝鮮民族運動年鑑』(駐上海日本總領事館,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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