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화랑도가 제정되기 이전에,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하여 청소년들을 조직해 단체생활을 통하여 수행(修行)하도록 한 뒤, 그 생활하는 가운데서 능력과 자질을 살펴 등용하려 하였다.
처음 이 조직의 우두머리로는 여성을 뽑았는데, 남모는 준정(俊貞)과 함께 원화로 선발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남모랑과 더불어 교정랑(峧(貞娘)을 원화로 선발하였다고 하였다. 그녀들은 무리를 300∼400명이나 모았으나 얼마 뒤 준정과는 서로 시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 죽였다. 후에 준정이 남모를 죽인 일이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이 남성을 단장으로 한 화랑제도를 제정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