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무산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함경북도 청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서 태(笞) 90도형(度刑)을 받았다.
1924년 4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1927년 9월 동맹이 노동총동맹(勞動總同盟)과 농민총동맹(農民總同盟)으로 분립되었는데, 이때 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과 신간회(新幹會)에도 관여하여 항일투쟁하다가, 1930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2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